공주의 남자에 나오는정종 선조의 이해

정기환 0 2,069 2011.09.29 12:18
<공주의 남자>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세령과 정종이 있다.

실제 <공주의 남자>의 주인공은 경혜공주와 정종일 수 밖에 없다.

정종은 문종의 사위가 되어 호위호식하였고, 단종이 왕이 되자, 어린 단종을 대신해서 수 없이 많은 재산을 불렸다. 단종은 1453년 중반 부터 계유정란이 일어나는 1453년 10월 10일 까지도 정종과 경혜공주의 집에서 이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등을 몰아내자. 정란공신이 되었지만, 점차 권력을 잃어가야 했다. 이에 정종은 금성대군과 혜빈과 함께 수양대군을 몰아낼 궁리를 하였지만, 오히려 수양대군에게 역습을 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1455년 6월 11일(윤) 수양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이 된다. 이때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였을때 권력이 있는 것이지, 왕에서 물러나 상왕이 된 다음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요즘도 대통령이 끝발이 있지, 전직대통령은 감옥이나 안가면 다행인 시절이다.

하물여 무소불위의 권력의 정점과 명분이 있는 왕이 상왕이 된다면 말이 왕위에 왕이지 무슨 권력이 있겠는가? 자신의 안위가 언제 불안해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말이다.

하지만,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은 목숨을 걸고 막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들은 좌익공신의 작위까지 받는다. 물론, 후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이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랫다는 변명을 사실처럼 전하지만 말이다. 배 떠난 후에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배는 오지 않는다.

어쨌든, 정종과 경혜공주는 끈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정종은 유배를 떠나고 유배를 떠난 후에도 반정을 꿈꾸었다. 다만 이때 사육신은 정종곁에 없었다. 오히려 사육신이 단종복위 실패를 하자, 정종과 금성대군 등은 서울 인근에서 더 멀리 찢어진다. 

사육신이 금성대군이나 정종과 함께 반정을 하지 않는 이유는 사육신과 금성대군과 정종과는 정치적 견해가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공주의 남자>에서 사육신과 정종이 함께 모의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 정종은 한번의 반정실패로 자유로웠던 통진 자신의 목장 유배지에서 감시가 더심해지는 정도에 그치는 형벌을 받았다. 사육신 사건이 터질때 정종과 경혜공주는 통진 유배지에 있었다.

사육신 반정복위 사건이 있었던 때는 실패하자 정종은 광주로 이배되고 남은 재산도 없어진다. 이때가 1456년 6월 20일 이후이다.
 


<공주의 남자>에서 김승유가 세령과 같이 광주에 도착하자, 경혜공주는 잘 왔다며 반기면서 세령에게 김승유가 자신을 받아 들였냐고 물어보고, 세령은 고개를 끄덕인다. 4명이 술자리를 하고 있는데 경혜공주는 부마 정종이 아버지가 될것이라고 말을 한다. 공주의 남자에서 1456년 6월 1일 단종복위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밤 처음으로 사랑을 확인했을때 잉태된 생명임을 공주의 남자는 보여주고 있다.


<공주의 남자>뿐만 아니라 많은 옛기록에 정종과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정종이 죽은 후에 낳은 유복자로 알려져 있고, 정종이 죽고 나서 경혜공주가 순흥부사 여자신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16세기 중엽 이전부터 윤근수의 <월정만록>, 18중후반~19세기초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경혜공주가 순흥관노로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정조는 이에 대해서 완벽한 사료비판을 하면서 경혜공주는 관노인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에 관해서는 두개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하나, 경혜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데 경혜공주가 유배지에서 정미수를 낳았고, 정미수는 정종이 죽은 이후 태어난 유복자라는 유언비어가 사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정조는 또다시 사료를 통해서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고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남겼다.

<해평가전(海平家傳)>에는 공주가 유배지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대내로 데려다 친히 길렀는데, 예닐곱 살이 되어 궁정에서 장난을 치며 노는 것을 보고 세조가 누구의 아이냐고 묻자 정희왕후가 곧장 전각에서 내려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실록을 상고한 바, 종이 을해년(1455, 세조1)에 유배지로 갔다가 곧바로 풀려나서 병자년(1456년)에 비로소 광주에 안치되었고, 처첩과 자녀들이 같이 따라가 살기를 자원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공주가 유배지로 따라간 시기는 당연히 병자년(1456,세조2년)일 것이고 병자년에서 신사년(세조7년, 1461)까지는 겨우 5년 동안인데, 설령 병자년에 곧바로 아들을 두었다 하더라도 예닐곱 살이 되도록 자랐다면 공주가 소환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까지 대내에 머물러 있지도 못하거니와, 또 과연 유배지에서 낳은 아이를 데려올 리도 없으니, 이 말은 매우 믿을 수 없다.


예종이 일찍이 “종의 아들과 그의 아내를 들여 뵙도록 하니, 세조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눈물을 훔치며, 나로 하여금 전교를 써 내려서 연좌를 윤허하지 말도록 하셨다. 내가 지금 어찌 감히 법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한 전교가 국사에 실려 있는데, 하신 말씀이 정녕하고, 영양위의 유사(遺事)에 미수(眉壽)가 공주를 따라 대내로 들어갔다고 한 기 실록과 합치되므로 지금 영양위의 유사를 따라 쓴다.



정조가 유학자에 뛰어난 역사학자라는 것이 다시금 증명이 되고, 똑똑한 정조가 신하들을 왜 비난을 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첫 임신한 경혜공주가 출산한 영아는 딸일까? 아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들이다.


그리고 경혜공주는 광주로 내려가기 전에 이미 출산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름은 정미수다. 1461년 정종이 죽고, 정미수가 서울로 경혜공주와 돌아올 때 7살이었다.


1474년 1월 1일 성종 5년 파란만장한 삶은 산 경혜공주 졸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여 경혜 공주(敬惠公主)에게 부의(賻儀)로 쌀·콩 아울러 70석(碩), 정포(正布) 50필, 종이 1백권, 석회(石灰) 60석, 촉랍(燭蠟) 30근을 내려 주게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처음에 정종(鄭悰)이 주살(誅殺)되니, 공주(公主)는 머리를 깎고 여승(女僧)이 되었는데,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세조(世祖)가 불쌍히 여겨 노비[藏獲]를 돌려주고,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집을 지어서 주게 하였다. 아들 정미수(鄭眉壽)는 나이 16세로 공주가 병이 위독해지면 약이(藥餌)를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옷은 띠를 풀지 않았으며, 똥을 맛보기까지 하면서 병을 보살폈다.” 하였다. - 성종 5년 1474년 1월 1일


정미수는 경혜공주가 아프자 경혜공주의 똥까지 맛을 보며 치료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1574년 1월 1일 새해가 넘어가지 경혜공주는 이승을 등졌다. 정미수는 어머니의 똥까지 맛 볼정도로 효자였던듯 하다.

위 사실로 정종과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1555년생 임을 알 수 있다.

정종이 광주로 이배된 때는 1456년 6월 1일 사육신의 반란사건 발각된 후, 1456년 6월 27일 사육신과 관련이 없었던 정종과 경혜공주는 통진 자기농장에서  전라도 광주로 이배된다.


정종은 금성대군과 연루되어 1455년 6월 11일(윤) 영월로 유배계획이 되었다가 단종이 하야하면서 보류되고, 양근이배 계획도 경혜공주가 아프다는 이유로 보류된다. 결국에는 8월 12일 수원으로 갔다가, 곧바로 1455년 8월 19일 정종의 목장이 있는 통진으로 간다. 1456년 6월 26일 광주로 이배되는 것이다.


정종이 죽은 때는 1461년 세조 7년 10월 20일이고, 경혜공주가 광주에서 돌아온 때는 정종이 죽은 3일 후인 1461년 세조 7년 10월 23일 이였다. 정조가 순천노비설을 배척한 이유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어쨌든 정미수는 1455년 생이다.


통진에서 광주로 이배될 때 정미수는 이미 2살이었다. 공주의 남자에서 정종과 경혜공주의 달달한 임신사실과 서로 기뻐하는 장면이 왠지 뜸끔없고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대목이다.


경혜공주가 처음 정종이 1455년 6월 11일 (윤) 유배계획이 있다가 경혜공주가 아프다는 핑계가 아닌 정종의 유배소식과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양위하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이미 임신한 상태에 있던 경혜공주가 쓰러졌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요즘은 임신진단은 2주미만도 체크가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배가 부르고 입덧이라도 해야 알 수 가 있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작은 충격에도 유산될 확률이 높다. 1455년 6월 당시 경혜공주가 아프다고 한 건 꾀병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미수는 1455년 8월 20일 이후 통진 목장에서 낳았을 것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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