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정 건(鄭健)
남은재 정공 묘표(南隱齋鄭公墓表)
아! 여기는 처사 남은(南隱) 정(鄭)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해주 사람이다. 시조 휘 숙(肅)은 고려조에서 벼슬하여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누세를 전하여 휘 을경(乙卿)은 장령(掌令)으로 문장이 세상에 알려졌다. 목은 이색(李穡)선생이 지은 망해루기(望海樓記)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 휘 강(崗)은 공조판서이고, 그 아들 휘 기(旗)는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이며, 아들 휘 숙(淑)은 문과 홍문정자(弘文正字)이고, 아들 휘 건(健)은 문과 목사(牧使)로서 공적이 많아 세상에서 이분을「남은선생」이라 일컬었다.
공은 일찍이 호남어사(湖南御史)로 청렴·강직한 명성이 온 나라에 알려졌으나, 내내 남원에 주거하여 여러 차례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으므로 자손들이 드디어 호남의 대족(大族)이 되었다.
배위는 전주 이씨 군수 함(瑊)의 따님이자, 완산백(完山伯) 양도공(良度公)의 후예로 성품이 완순하여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었다.
소생은 1남 2녀로, 1남 세필(世弼)은 주부이고, 장녀는 군수 윤신로(尹莘老)에게, 차녀는 김돈(金敦)에게 시집갔으며, 내외의 손자 증손과 묘지의 좌향은 장지(狀誌)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는 덧붙이지 않는다.
아! 선생의 공적과 덕행은 모두 영구히 유전될 만하다. 선생의 묘역에 있는 나무가 이미 아름드리로 자랐으나 그 후손은 부진하여 그 만분에 하나도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다음의 사관이 선생의「염직(廉直)」두 글자만을 특서(特書)해 준다면 만족할 뿐인 것이다.
가선대부 전 영변 군수 윤영구(尹甯求)는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