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5일 벽송사를 찾아 주지 法峻 스님 의 안내로 보이차로 마음을 수양하고
경내를 참배하고 8시가 넘어 연등에 주지스님의 점등을 지케보면서 주지스님의 대화내용과
주지스님이 직접부르신 연불가 두곡을 동영상에 올려봅니다 우리일행은 9시가 넘어 주지스님의 배웅을 받아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 를 소개 할까 합니다
055-962-5661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259
벽송사(碧松寺)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碧松智嚴)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
명대사가 수행햐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에서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
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회암
정혜, 경암용윤, 서룡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
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겸수한 대 종장들을 109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千峰萬壑)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芙蓉:연꽃)
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芙蓉滿開),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
고인이 “운거천상(雲居千上: 구름 위 하늘 세계) 별유천지(別有千地: 인간 세상 밖에 따로 있는), 부용정
토(芙蓉淨土: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에) 조인만대(祖印萬代:조사의 깨달음을 만대에 이어지리)”라는 말로
표현하였듯이 벽송사는 만고에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하고 있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선사는 태고보우, 벽
계정심 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心印)을 전해받아 조계정문(曹溪正門)의 정통조사가 되었다.
선사는 “무자화두(無字話頭)에 의해 무명(無明)을 타파하고 선요(禪要)에 의해 지혜의 병을 떨쳐버렸으니,
간화선 수행법(看話正宗)에 의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되었다. 그래서 벽송사는
간화선의 제일 조정(朝庭)으로서의 역사를 간직산 ‘한국선불교의 근본 도량'이 되는 것이다. 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산문의 제2대 조사에 오른 분이 부영영관(芙蓉靈觀)선사이다.
부용선사는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배우러 오는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특히 영호남 일대에 부
용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가 수 없이 많아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기가 난다”라
고 하는 말이 널리 유행하였다. 부용영관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靑虛休靜)과 부휴선수(浮休善修)이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3대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
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 하게 된다. 한국
선문의 거장 청허휴정이 벽송조정의 제3대조사라는 사실은 벽송사 사적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서산대사
문하에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병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부용영관의 다
른 한 사람의 수법제자인 부휴선수선사 또한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벽송산문의 조사가 되어 오랫동안 지
리산에서 행화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 출가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한다. 서산과 부휴 양대조사가 모두 벽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벽송사가 조선불교의 종가(宗家)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벽송사를
가리켜서, “조계조정(曹溪朝庭), 벽송총림(碧松叢林), 선교겸수(禪敎兼修), 간화도량(看話道場)”이라고
불렀다.
1704년(숙종30년)에 환성지안(환성지안)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상주하는 스님이 300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
자는 10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로부터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선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는 강원이 개설되어 근세 일제강점
기까지 지속되었으니, 근 300년 동안 조선불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이로부터 선교를 겸한 대종장들이 벽송사에 수선안거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게 되니, 강당을 거쳐
간 강주(講主)스님 만도 약 100인이나 되니 학인과 납자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근대에 선지식이신 경허선사도 벽송사에 주설하며 서룡선사 행적기록을 집필하였다.
특히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를 역임한 초월동조(初月東照)대사는 일제 강점기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
다. 일제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불교 최고의 조정인 벽송사의 사세도 기
울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지리산 빨치산들의 암약(당시 벽송사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됨)으로 말마
암아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구한원응(久閒元應)
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 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옛날 선종의 최고 조정에 벽송선원을 낙성하여 을
유년(2005년) 하안거에 개원하여 눈푸른 납자들이 수선정진할 수 있는 선찰종가(禪刹宗家)로 거듭나게 되었
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보물 제 474호)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회인 목장승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특히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
의 전설이 깃들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선방뒤 탑전앞에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는“
도인송(道人松)”과 “미인송(美人松)”의 전설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하면 애정이 돈독해
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유래없이 많이 나와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조선 선불교 최괴의 종가인 벽소사를 참배하여 묵은 업장을 소멸하고 청복(靑福)을 담아 성불인연을 가꾸어
보자. 아울러 벽송사 목장승과 도인송, 미인송의 기운을 받아 건강과 소원을 성취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글은 벽송사 홈페이지에서 옮계옴을 밝혀 둡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