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암 정식(해.정 13세)의 월출산록(1725년 撰)을 보고.....
덕산 무이정사 유계 정태종 사무국장
1. 진주선비 명암 정식, 영암 월출산을 유람하다.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는“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그늘지며 개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며 기이함을 자랑하누나”라고 예찬했고, 조선 세조 때의 시인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도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하고 노래했다.
이처럼 시인묵객에 의해 칭송을 받은 월출산은 선비들에게 유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월출산 유람을 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유람의 글이 제대로 전하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고 소개가 된 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문인인 김창협(金昌協·1651∼
1708)이 지은 <등월출산구정봉기(登月出山九井峰記)>이
다. 하지만 김창협의 이 기문은 월출산의 한 봉우리에 오른 것을 집중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월출산에 올랐던 제대로 된 유람록은 김창협보다 30년쯤 뒤에 태어난 경상도 선비에 의해 이뤄졌다. 곧 경상도 진주에 사는 명암(明庵) 정식(鄭栻·1683~1746)이 월출산 유람을 마치고 쓴 <월출산록>이 그것이다.
영암 지역 가는 길, 멀리서 보아도 범상치 않은 자태와 아름다운 모습의 월출산은 영암의 상징이자 자랑으로 1973년 3월 남서쪽 도갑산 지역을 합해 월출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15년 뒤인 1988년 6월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자연 및 문화경관을 보호하고 국민 보건·휴양 및 정서생활 향상을 위한 관광지로서의 개발 가능성을 인정받아 우리나라 2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이후 관광과 등산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월출산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의 최고봉은 천황봉(天皇峯·809m)이며 남서쪽에는 구정봉(九井峯·743m)이 연이어 있고, 구정봉 남쪽으로는 도갑산(道岬山·376m)·월각산(月角山·456m) 등이 있으며, 천황봉의 북쪽으로는 장군봉(將軍峯)·국사봉(國師峯) 등이 연봉을 이룬다.
이 기록을 남긴 명암 정식은 자가 경보(敬甫)이고, 호는 명암(明庵)이며, 본관은 해주이다. 그의 고조 정문익(鄭文翼)은 임진란 때의 이름난 의병장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아우이다. 그는 형 정문부가 이괄(李适) 난에 연루됐다고 화를 당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집안을 이끌고 남쪽으로 옮겨와 살았다. 1683년 진주 옥봉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거처하던 정식은 만년에는 두류산 자락으로 들어와 살았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지금도 그가 만년에 노닐던 산청 구곡산(九曲山)의 무이구곡(武夷九曲) 유적 등이 남아 있다.
그는 젊은 시절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과거를 단념하고 돌아와 명암거사(明庵居士)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명암이란 임진란 때 우리나라를 도왔던 명나라를 사모하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오랑캐(청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시대에 명나라를 그리며, 평생을 살다가 1746년 64세로 세상을 떠날 때에도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나의 명정(銘旌)을 쓰도록 하라”라고 했다. 그가 이처럼 명나라를 존숭하였던 일은 그 스스로 지은 ‘명암전(明庵傳)’이라는 자전에서 명암이라 이름 지은 까닭을 밝힌 데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월출산과 월출산 유람 때 함께 구경했던 천관산을 비롯해 가야산, 태백산, 소백산, 오대산, 금강산, 묘향산, 금산 등 많은 산을 유람했으며, 또 가는 곳마다 유람기를 남겼다. 이 모든 곳의 유람록이 다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집에는 여러 편의 유람기가 있다. 그 가운데 월출산 유람기인<월출산록>은 그의 다른 유람록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월출산 유람에 대한 제대로 된 장편의 유람록이 드문 가운데, 경상도 선비가 지은 장편의 유람록이란 점에서 귀중한 자료라 할 것이다.
그는 41세였던 1725년 월출산 유람을 결행하면서, “내가 일찍이 중한테 들었는데, 호남의 명산으로는 월출산이 제일이고, 천관산(天冠山)이 그 다음이라고 했다. 한번 구경하고자 했으나 거리가 먼 것이 문제라 한갓 수고롭게 꿈속에서만 생각해 왔다. 그러다가 문득 혼자 마음속으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공명과 부귀는 하늘에 맡긴다고 하지만, 아름다운 산과 경치 좋은 물은 내 분수 안에 있는데, 어찌 스스로 기가 죽어 미적거리기만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매우 큰 결심을 해야 하는 월출산 산행의 어려움을 보여 주고 있다.
옛날 명산 유람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는 <월출산록> 본문의 구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머리는 월출산으로 가는 노정을 기록한 것이고, 가운데는 월출산을 유람하며 기록한 것이고, 마지막은 월출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노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1725년 10월 22일에 월출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11일 뒤인 11월 3일 월출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11월 4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월출산을 유람했다. 11월 5일 유람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출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던 길보다 일정이 짧아 8일 만에 돌아왔다. 이렇게 보면 오고가는 데에 19일, 유람 1일 등 모두 20일의 일정이 소요됐다. 지금은 진주에서 왕복 6시간이면 충분한 것을 19일이나 걸렸으니, 옛날 경상도 진주에서 월출산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오고가는 19일 동안 오로지 길만 가고 온 것이 아니라, 가는 길에 혹은 오는 길에 주변의 명승이나 유적에 들렀다. 호남의 명산으로 꼽았다는 천관산도 이때 잠깐 들렀고 , 승주의 선암사, 송광사 등도 가는 길에 들렀던 것이다. 그래서 가는 길이 오는 길보다 3일 정도 더 걸렸다.
2. 월출산으로 가는 길
정식이 집을 떠나 진주에서 월출산으로 가는 일정은 진주 → 안양(安養) 대홍교(大紅橋) → 환선정(喚仙亭) → 시옥동(始玉洞) → 조계산 → 선암사 → 송광사 → 천자암(天子庵) → 보성 신촌(新村) → 팔선정(八仙亭) → 장흥 임시촌(林柿村) → 강진 죽사(竹寺) → 월출산이었다. 그런데, 그는 선비라는 본분에 맞게 가는 동안 지나는 선현의 유적지에 들러 보고, 이를 소개하고 이에 대한 감상을 말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 새벽에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러 안양(安養)의 대홍교(大紅橋)를 지나 환선정(喚仙亭)에 올랐다. 정자의 붉은 난간이 시내 위에 걸쳐 있었고, 그 위에서 보니 큰 들판은 끝이 없었다. 백일홍이 어지러이 피어 있었고, 뜰에는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과 창해(滄海) 허격(許格)의 현판이 있었다. 부 관아의 뒤쪽에 지봉을 모신 서원과 한훤당(寒暄堂)을 모신 서원이 있었다. 시내 위에 돌을 세어 임청대(臨淸臺) 세 글자를 크게 썼는데, 퇴계선생(退溪先生)의 필적이다. 그 아래에 오래 된 녹나무 몇 그루가 있고, 황폐해진 대가 반쯤 무너졌는데, 곧 매계(梅溪), 한훤당 두 선생이 귀양살이 할 때 쌓은 것이라 한다.
환선정은 순천부 동문 밖에 있던 정자 이름이다.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무오사화가 일어나 점필재가 지은 사초(史草)가 문제되었을 때, 점필재의 제자라는 이유로 순천부에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임청대를 지어 놓고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매개 조위(曺偉)도 점필재의 처남으로서 점필재가 부관참시를 당하는 상황에서 역시 무오사화 때에 순천으로 귀양을 오게 됐다.
이와 같이 정식은 순천부를 지나면서 정자, 서당, 글씨, 이름난 사람의 유적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처럼 유학자들이 남긴 유물, 유적에 깊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좋은 경치에도 높이 평가했다.
선암사에 들어가는 계곡은 시원하고 깨끗하여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 가운데 또 하나는 승선교(昇仙橋)라는 무지개다리이다. 선암사의 대표 명물인 위아래의 크고 작은 두 개의 홍교는 너무나 멋진 모습을 뽐내며 그곳에 있다. 다만 달라져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정식이 사치스럽고 정교하다고 극찬을 한 승선교 우의 대들보가 없는 열십자 모양의 집이다. 이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었더라면 두 개의 무지개다리와 그 아래 흐르는 계곡, 그리고 들보 없이 지어진 화려한 십자각이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었을 텐데 무척 아쉽다.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선암사 맞은편에 있는 것이 송광사이다. 이 두 사찰은 요새도 등산객들이 걸어서 즐겨 오가는 코스 가운데 하나이다. 정식도 이 코스로 29일 송광사에 들어갔다.
고개 하나를 넘어 송광사에 들어갔는데, 이곳도 역시 조계산에 속했다. 하얀 돌과 매달린 듯한 폭포가 가야산(伽倻山)의 홍류동(紅流洞)과 다르지 않았다. 석의(石衣)가 드리워져 있었고, 소나무와 전나무가 울창했다. 가다가 가끔 앉아 쉬었는데, 차마 지나갈 수가 없었다. 중이 말하기를, “이 절은 보조국사(寶珠國師)께서 창건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절 문 바깥에 절로 말라 죽은 나무가 있었는데, 중이 말하기를, “국사께서 이 나무를 심으시며 ‘내가 도로 살아나면 이 나무에 잎이 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대개 그 나무는 길이가 서너 발이나 되고, 희고 껍질이 없습니다. 위에 몇 백이 되었을지 모르는 두 개의 마른 가지가 있는데, 썩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으니 또한 특이하지요”라고 했다.
입구의 주차장에서 내려 송광사까지 가는 길은 매우 아름답다. 어느 사찰이든지 유서 깊은 곳은 들어가는 입구가 환상적이다. 흙길을 걸으며 길 가에 늘어선 고목의 향기를 맡고, 시냇물 소리를 듣는 것은 이제 사찰의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면 쉽게 볼 수 없다. 송광사 입구도 그 대표적인 곳 가운데 하나이고, 여기에서 비교대상으로 거론한 해인사 들어가는 홍류동계곡도 그러하다. 물은 없지만 고목이 늘어선 것으로는 변산의 내소사와 오대산의 월정사 입구 등이 꼽힌다.
정식이 송광사에서 특별히 말한 것은 송광사를 창건했다고 하는 보조국사라는 스님과 관련된 전설이었다. 그는 유학자로서 믿을 만한 이야기라 할 수 없지만,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무시하거나 그렇다고 자신이 그것을 기록하지 않고, 안내하는 승려의 이야기를 그대로 소개했다.
보조국사의 이 나무는 지금도 보조국사 고향수라는 이름으로 송광사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이야기와 설명은 옛날 정식이 듣고 기록한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3. 월출산 유람에 대한 기록
11월 1일 보성의 신촌(新村)에서 자고, 2일 장흥의 임시촌(林柿村)에서 잔 뒤에, 3일 강진의 죽사(竹寺)에서 잤다. 그리고 4일 월출산 유람을 하였는데, 월출산에 대한 첫인상은 “아침에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았더니, 월출산 바위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 눈으로 구경하니 마음이 즐거워 걸음을 재촉하여 갔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산행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삼존암(三尊庵) → 천황봉→ 용암암 → 구정봉→ 백운암
대략 두 개 봉우리와 세 곳의 암자인데, 천황봉과 구정봉, 그리고 삼존암, 용암암, 백운암이다. 봉우리는 하루에 많은 곳을 모두 갈 수는 없으니, 대표적인 봉우리에만 갔다고 하겠다. 그런데 암자나 사찰은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월출산의 대표적인 사찰은 무위사와 도갑사인데, 기록에는 두 곳 모두 언급이 없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삼존암을 당시 정식은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선경이라고 했다.
월출산 삼존암에 올랐는데, 이 암자는 우뚝한 돌 산 사이에 있었으니, 정말 선경(仙境)이었다. 온 산이 모두 돌이었는데, 바위 모양이 기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떤 것은 나는 새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달리는 짐승 같기도 하고, 사람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중이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짐을 지고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쉬는 것 같기도 하고, 돌아보는 것 같기도 했다. 칼인 듯, 창인 듯, 깃발인 듯, 바둑알을 포개 놓은 듯, 둥근 구슬인 듯한데, 이름을 붙이거나 형상하거나 할 수 없었다.
암자 뒤에는 천황봉이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암자 앞에는 사미봉이 마치 붓을 세워 놓은 듯 서 있었다. 창 앞에는 삼층탑이 서 있었고, 뜰 아래에는 봄 동백이 있었는데 나뭇잎은 푸르고 잎은 붉었다. 이때는 겨울인지라 푸른색과 붉은색이 섞여 있었고, 어떤 것은 꽃이 피고 어떤 것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는데, 결코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올라서 하는 이야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산의 경치가 마치 인간세상이 아니고 신선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흔히들 가는 곳마다 말하곤 한다. 정식도 예외 없이 월출산에 올라 본 경치를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선경과 같다고 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천황봉과 사미봉, 그리고 암자 앞의 탑과 뜰 아래의 동백 등이 어우러진 경치를 보고 결코 인간세상이 아니라고 했다.
천황봉은 월출산의 주봉이니만큼 정식도 그에 대해 보고 느낀 많은 이야기를 했다. 특히 험한 길과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주로 묘사했다. 천황봉에서 두류산이 동쪽에 보이고 서쪽에는 무등산이 눈썹처럼 가로 놓여 있다고 했다.서해 바다를 바라본 것도 기록했다. 험한 길을 가자니 절벽을 붙들고 몸을 돌려 내려오는 등 정신없이 산에 오르고 내려온 느낌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곳의 식생에도 관심을 가져서 잡풀, 잡목 대신 소나무, 전나무, 박달나무, 동백 등이 울창한 모습에 대해서도 말했다. 주봉에 오른 감상이 이만하면 매우 자세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천황봉 중턱에서 구정봉에 올라 그곳에서의 감상을 이야기했다.
암자의 중과 함께 구정봉에 올랐다. 층층의 바위가 절벽 모양으로 서 있는 그사이에 돌구멍이 자연스럽게 뚫려 있었는데, 겨우 사람 몸을 들일 수 있었다.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 굴속으로 고 들어갔더니, 그 굴 아래위로 사람의 발자취가 있었다. 그 높이가 만여 발이나 되어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굴에서 도로 나왔다. 구정봉 꼭대기에 또 층층의 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 위에 움직이는 돌이 있었는데, 높이는 한 발 남짓했고, 둘레는 서너 아름 되었다. 밀며 흔들어 봤더니 움직였다. 옛날에는 여기에 세 개의 움직이는 돌이 있었는데, 당나라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여 밀어서 내려버렸다고 한다.
역시 험한 구정봉에 이르는 길을 이야기했고, 그곳의 흔들바위에 대한 전설도 이야기했다. 흔들바위 세 개 가운데 하나만 남아 있으며, 두 개는 당나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하여 밀어서 떨어뜨려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전했다. 최근에 설악산의 흔들바위를 미국인이 흔들어 굴려버렸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떠도는 것과 비슷한 것은 아닌가 하여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천황봉과 그 앞에 있는 구정봉이 월출산의 대표경관이라 할 것이니, 이에 대한 언급도 대표적이라 할 것이지만, 정식의 월출산에서의 글은 천황봉과 구정봉 사이의 경관을 가장 자세히 묘사했다.
매우 여러 번 굽은 오솔길을 걸어가 구정봉 아래에 닿았다. 문득 서쪽 바다를 바라보았더니, 물과 하늘이 아련한 곳에 환한 해가 질 듯 말 듯하고 있고, 붉은 해무기가 일렁일렁하며 마치 거꾸로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는데, 정말 천하의 기이한 광경이었다. 중이 말하기를, “이 산은 멀리 서해 바다와 통해 있기 때문에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 했다.
그대로 바위 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문득 산 아래로부터 올라와 산과 골짜기를 덮어 버렸다. 어지러이 날고 자욱이 끼었는데, 소매 속으로 날아들기도 하고 가랑이 사이로 날아서 짜져나가기도 했다. 때로는 얼굴에 닿기도 하고, 때로는 갓에 닿기도 하는 등 갑자기 다가왔다가 갑자기 가기도 하는 등 서로 이어져 끊임이 없었다. 서늘한 기운이 몸에 스며들고 쌩쌩하는 차가운 소리가 귀에 가득하였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일행을 서로 잃어버려 허둥지둥하며 바삐 소리쳐 부르면서 어디로 향해서 가야 할지 몰랐다. 서로 붙들고 끌어안고서, “바위틈에서 붙어 자야겠다. 잘못 되어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했다.
그는 월출산의 주봉인 천황봉과 구정봉 사이에서의 느낌과 경치 가운데에서도 특히 구름이 끼었다가 걷힌 모습을 보고“비록 잠깐 사이지만 능히 구름을 타고 바람을 거느리고서 황홀하고 아득한 속에서 내 자신이 놀았으니, 매미처럼 티끌세상의 허물을 벗고 날개가 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고 하여, 마치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경치로 치자면 천황봉에서 멀리까지 내다보이는 것이 좋았지만, 느낌은 이곳이 천황봉이나 구정봉 꼭대기보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에 바로 이어서“비록 신선들이 먹는 바람과 이슬 사이에서 호흡하여 세상을 건너뛰어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속세의 바깥의 이름난 산에서 한나절 신선이 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었다”고 하여, 반나절 신선이 되었음을 말했다.
4. 월출산에서 돌아 오는 길
정식은 월출산 산행의 맨 마지막 노정으로 11월 4일 백운암을 방문하고, 그곳의 동백나무를 감상했다. 그리고 절벽에 이름을 새기고, 그곳에서 잤다. 그리고 5일에는“드디어 산을 내려서 집으로 향했다”고 했다. 꼬박 하루 동안 월출산 곳곳을 돌아보고 잠을 잔 뒤에 이튿날 바로 집으로 출발한 것이다. 월출산을 향해서 갈 때 그랬듯이 집으로 향해서 돌아올 때도 여러 곳을 구경했다.
집으로 오는 동안에 들른 곳은 백운동 → 강진 우두산(牛頭山) 고성암(高聲庵) → 천관산 천관사 → 구정암 → 장전(長田) 마을 서재 → 보성 개흥사 → 낙안 고을 → 순천 운곡(雲谷) → 광양 시지곡(時至谷) → 하동 행보(行保) → 두리현(頭理峴) 칠송정(七松亭) → 진주이다. 첫 번째 방문지는 월출산에서 5, 6리쯤 떨어진 백운동이었는데, 승려가 추천해 준 곳이었다.
백운동은 주서라는 벼슬을 지낸 이공의 계당이 있는 곳이라 했는데, 이공이 누군지는 밝혀 놓지 않았다. 그곳은 월출산에서 뻗어 나온 산기슭으로 강진지역이라 했는데, 주인도 없고 건물은 거의 무너진 황폐한 상태였다고 아쉬움을 드러내었다. 추천을 받아 간 곳이지만, 관리가 되지 않고 버려진 곳이라 구경하기에는 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으로 내려가서는 우두산 고성암에서 자고, 이튿날 6일에 천관산(天冠山) 천관사에 들어갔다. 천관산은 처음 월출산 일정을 시작할 때에 호남에서 월출산과 더불어 가장 경치가 좋다고 했던 그곳이다. 천관산은 지금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으로 경치가 뛰어난데, 월출산을 본 정식에게는 그리 큰 감흥을 안겨주지 못했다고 하겠다.
천관산은 등산을 하지 않고 바로 천관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천관사에 대해서는 이름난 절이었지만 우물이 없어 나무통으로 물을 길어오는 것이 흠이라고 간략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7일 구정암에 올라서는, “신선이 살 만한 제일가는 암자였다. 백 길이나 되는 파르스름한 바위가 좌우에 병풍처럼 둘러 있고, 처마 아래의 돌 틈에서 옥정(玉井)이 솟아나고 있었다”고 간략하게 말했다.
8일과 9일에는 장흥(長興)과 보성을 지났는데,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다만“보성 개흥사(開興寺)에서 잤는데,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다”고 한 것에서 보듯이 구경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일 낙안(樂安) 고을을 지나며 경치보다는 유학자답게 효자비에 관심을 보이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낙안 고을을 지나가니, 길옆에 효자 송문찬(宋文粲)의 정려(旌閭)가 있었다. 그 기문(記文)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공의 부친이 전염병에 걸려 숨이 막혀 이미 다시 살아날 희망이 없었다. 공은 그때 여섯 살이었는데, 어머니에게 일러 말하기를, “밤에 꿈을 꾸었더니,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 말하기를, ‘네가 손가락의 피를 내어 너의 아버지 입에 넣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시험해 보겠습니다”라 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흘려 넣었더니 바로 살아났다. 그리하여 이십여 년 더 생존했다. 그 조카도 그 아버지를 위해서 피를 흘려 넣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고 기문 끝에 아울러 기록되어 있었다.
오늘날 이 이야기도 송광사 보주국사 지팡이 나무 설화와 마찬가지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 하겠는데, 보주국사 설화에 대해서는 승려이야기를 전할 뿐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 효자비를 읽고는 그는“우러러 보고서 읍(揖)을 했는데, 나도 모르게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했다.
10일 광양, 11일 월출산으로 갈 때 처음 잠을 잤던 하동 행보의 천태산 집에 자고, 다음날(1725.11.12)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일정은 끝이 났다. 그는 20일간에 걸친 월출산 유람을 하고 매우 서운만 마음을 드러냈다. 특히 월출산에 올랐다가 하산하면서 그런 감정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같이 갔던 강성보(姜聖輔)가 나를 향하여 말하기를, “함께 이름난 산에 들어와 마음껏 유람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이제 문득 산을 내려가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산은 만고토록 오래 남아 있겠지만, 우리들의 생애는 한정되어 있으니, 이름난 산을 한번 이별함에 반드시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으로 느껴 슬퍼집니다”라고 하고는 울어 서너 줄기 눈물을 흘렸다. 나도 어느새 목이 메어 있었다.
동행인이 보이지 않았다가 월출산 유람을 모두 마치고 산을 내려가는 이때에 처음 등장했다. 동행인은 강성보라는 사람인데, 산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산을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슬프다고 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정식도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멘다고 했다.
정식은 이러한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이 유람록을 남겼는데, 글의 맨 뒤에 유람록을 짓게 된 까닭을 설명하여 “아아! 달팽이 껍질만 한 오두막에 돌아와 문을 닫고 혼자 앉았으니, 이름 난 산의 물과 돌이 마음과 눈에 뚜렷하다.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는데 다시 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니, 심심하고 불평스러워 놀았던 전말을 대략 적어 머리가 허옇게 되었을 때 다시 볼 것을 도모한다”고 했다.
요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번 가본 곳을 또 가기는 쉽지 않은데, 옛날 20일이나 걸려 갔다 온 길을 다시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식이 다시 월출산 산행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머리가 허옇게 되었을 적에 다시 보겠다고 남긴 <월출산록, 1725년 11월 12일 撰>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遊覽錄은 두류록(1724), 가야산록, 금산록(1725), 관동록(1727), 청학동록
(1743)(6錄, 명암집 5卷)과 함께 山水文學의 典範으로 韓國漢文學史에 새롭게 도입,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각급 學術機關에서 평가하고 있다.
해주정씨 용강공파 종중/무이정사 유계 사무국장 정태종 삼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