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평사 부조전 제례 내용 안내>
지난 5월 26일(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로 271번길 13 주소에 있는 해평사 부조전 제례 행사에 대종친회에서는 행섭고문, 판섭부회장과 종파의 많은 제관들과 함께 참석하여 엄숙한 가운데 봉행 드렸습니다.
<해평사 제각 모습>
이날 해평부원군 미수(眉壽)선조님 제례 초헌관 종현님과 아헌관 기승회장, 종헌관 상근(삼옥공)님 그리고 홀기 태성대부, 축문은 우섭 전회장께서 독축하셨습니다.
<해평부원군 제물 진설 모습>
19대 할아버님 병충분의 정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행 의정부우찬성 겸 영경사판의금부사 해평군 층시 소평공부군과 19대 할머니 정경부인 전의이씨 19대 할아버님 해가 바뀌어 돌아가신 날을 다시 맞아 조상님의 은혜와 근본에 보답하는 예와 사모하는 정을 잊지 못해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으로 세사(歲事)를 올리오니 두루 흠향(歆饗)하여 주옵소서.(제물을 받으십시오)
<해평군 할아버지 한글 축문>
15대 할아버님 자헌대부 지돈령부사 해풍군 증시 제순공부군님 과 15대 할머님 정부인 전주유씨님과 15대 할머님 정부인 진주유씨님과 15대 할머님 정부인 청주한씨님과 15대 할머님 정부인 전의이씨님께 4월 제례일을 맞아 조상님의 은혜와 근본에 보답하는 예와 사모하는 정을 잊지 못해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으로 세사(歲事)를 올리오니 두루 흠향(歆饗)하여 주옵소서.(제물을 받으십시오)
<해평군 할아버지 한글 축문>
첫째 정부인 전주유씨 할머님 헌관 창근님, 둘째 정부인 진주유씨 할머님 헌관( )님, 셋째 정부인 청주 한씨 할머님 헌관( )님, 넷째 정부인 전의이씨 할머님 헌관( )님과 홀기 진행은 태성대부님, 축문은 우섭회장님께서 독축하시는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아헌관 봉행 모습>
미수(眉壽) 선조님께서 단종 비 정순왕후를 극진히 모신 후 자손들이 대대로 정성껏 받들며 돌아가신 날과 명절 때가 되면 새벽 일찍 목욕하고 손수 방과 대청을 쓸고 닦으며 음식 만드는 일과 상 차리는 일들을 하녀와 하인들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던 가례를 살려 이날도 종현 대종손 부부께서 전체적인 제례 준비와 축문 쓰기, 제상에 제물을 직접 진설(陳設)하며 정성과 효성을 다하는 모습과 제례 마친 후에도 제물(祭物)을 공평하게 배분한 봉가를 싸서 모든 제관들이 집으로 갈 때 가지고 갈 수 있게 하는 옛스럽고 정성스러운 마음은 타 문중에서 볼 수 없는 모범되고 자랑스러운 가문의 전통제례 풍속계승이라 높이 칭송 드리고 싶습니다.
<해평사 건축년도 머릿돌 모습>
<해평사 제례 준비 모습>
사육신(死六臣)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단종 임금은 노산군(魯山君)으로 영월로 유배되고 매형이며 형조판서를 역임한 아버지 영양위(悰)께서도 세조7년(1461) 반역(反逆)을 도모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陵遲處斬) 당하면서 해주정씨집안도 멸문(滅門)의 화를 입게 되는 불운을 맞게 되었고 어머니 경혜공주도 광주 순천부(順天府)의 관비(官婢)가 되었으며, 세종 여덟 번째 왕자 영응대군의 배위인 영양위의 누이 춘성부부인까지 폐서인 되면서 가산을 몰수당하는 어려운 시대를 사셨습니다.
<해평사 입구 출입문 모습>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尹氏,1418년12월8일~1483년5월6일)의 도움으로 미수(眉壽)할아버지께서는 생명을 유지 할 수 있었으며 7살 때인 1462년(세조8년) 어명으로 경혜공주와 함께 서울로 들어와 궁중에서 성장했으나 어머니 경혜공주는 딸의 출산 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1473년(성종4년) 돈녕부 직장으로 벼슬 시작하여 1495년(연산군1년)에는 당상관, 1506년(연산군12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병충분의정국공신에 책록되고, 1507년(중종2년)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책봉
되셨습니다.
<해평사 측면 모습>
1512년(중종 7년) 음력 4월 15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하셨으며, 이 해 음력 8월 1일 경기도 양주(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해평부원군 할아버지께서는 전의 이씨 이덕량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첩실도 있었으나 자녀가 없어 7촌 조카이며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내고 찬성(贊成) 벼슬과 해림군(海林君)을 추증 받은 정승휴(鄭承休)할아버지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고 합니다.
미수(眉壽) 할아버지께서는 조선 제 6 대왕 단종(端宗)비 송씨(宋氏) 정순왕후(定順王后)가 연미정(燕尾亭)에 나가 살며 정업원(淨業院) 주지(住持)라 불렀는데 성종왕의 허락으로 시양자(侍養子)가 되어 82살 돌아가실 때 까지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받들어 모시는 효성스러운 일을 온 세상이 칭찬 했으며 아들 도사공(都事公) 승휴(承休) 할아버지께서도 아버님 대신 3년 상을 입고 양주(楊州)에 있는 선산 기슭에 장례를 모시니 곧 지금의 사능(思陵)이며 사릉(思陵)은 왕비 능으로 복위되기 전까지 해주 정씨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서 관리하였다는 자랑스러운 기록이 있습니다.
<해평군 할아버지 제물 진설 모습>
10세 해풍군<1577(선조10)~1665(현종6)>할아버지께서는 조선중기 문신이며 이름은 효준(孝俊), 자는 효우(孝于),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휘 숙(肅)을 시조로 하여 고려 명신이었으며 조선에 들어와 찬성(贊成) 벼슬을 지낸 정도공(貞度公) 휘 역(易)할아버지께서는 훌륭한 문장과 학문으로 태종과 세종을 섬겨 증영의정(贈領議政)의 이름난 대신이셨습니다.
아들 휘 충경(忠敬)할아버지는 형조참판을 지내셨고, 참판의 아들 종(悰)할아버지는 문종대왕(文宗大王)의 따님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양위(寧陽尉)에 봉해지셨습니다. 영양위(寧陽尉)할아버지의 아들 미수(眉壽)할아버지께서는 재주가 “뛰어났으나 과거를 보지 않은지라 나라에서 조상의 공으로 벼슬을 내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이 되므로 다시 정씨 집안을 일으키게 되니 이 분이 바로 해풍군(海風君) 할아버지의 고조가 되십니다.
<해풍군 할아버지 영정 모습>
<해평사 제례 봉행에 참석하신 제관 모습>
오랫동안 대종친회에 제례위원님들의 협조를 얻어 해주정씨 각 파종별로 제례 방식이 통일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혹 내용이 잘못 기재된 부분이 있으면 이해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해주정씨대종친회
회장 정기승 배상.
자세한 내용 역사와 축문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주소 진근읍은 진건읍 오타인 것 같구요
축문에 대하여 종손이 쓰신 축문에 19대 조고, 19대 조비 또 19대 조고가 두번 들어가
있습니다. 한글 축문에서도 그리 되어 있구요
종손이 쓰신 해풍군 축문에는 15대 조비 --전의이씨 다음 영정이 들어가 있으나
한글 축문에는 안들어 있구요.
해평부원군에는 영정이 안들어가 있구요.
제단 이나 묘, 영정 모시고 지내는 경우의 표기 방법인 것 같습니다만 .
축문 직접 써보니 심오한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해설이 있으니
종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긴 글을 끝까지 잘 읽어 주시고 축문이 이해에 도움되신다니 더욱 고맙습니다.
지적하신 주소 오타는 수정 했으며 축문에 19대 조고를 두번 쓰는 것은 첫번째 19대 조고에는 생전 벼슬과 사후 벼슬과 휘를 기재하고 뒤에 기재하는 19대 조고는 19대 할아버지의 기일이기때문에 사모의 정을 잊지 못해 음식을 차려 봉행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해평사>에는 <해평군 할아버지>의 영정은 보관되지 않고 <해풍군 할아버지의 영정>만 있어서 당일 영정 앞에 제향 했습니다.
질문에 대한 만족하는 답변이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 적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공연한 수고를 하시게해서 송구스럽습니다.
저 같이 잘 모르고 있던 분들에게는 저의 질의와 회장님 해설이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자위해봅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