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셨는데,
농포공 선조께서는 첫째, 북으로 들어간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약탈되어
그 유언에 따라
진주는 농포공이 창원부사 재임 중
가. 농포공 부조묘와 종택 유교사회에서 조상의 제사는 4대까지 받들고 4대가 넘으면 사당의 신주를 묘에 묻고 시제를 모시게 되었지만 나라에 공훈(功勳)이 있는 분의 신위(神位)는 공인절차를 받아 왕의 허락으로 신주(神主)를 옮기지 않고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한 특전을 부조묘(不祧廟) 또는 부조전(不祧典)이라 하여 가문의 영예로 여겼는데, 진주향내에는 해주정씨와 문화 유씨 두 가문이 있습니다. 농포공의 부조묘는 5대손 죽와 정근(竹窩 鄭瑾 1725~1799)공의 상소로 1789(정조 14)년 4월 왕의 윤허를 받아 진주의 까꼬실(貴谷)에 모셨다가 남강댐 수몰로 1995년 현재의 이반성면 용암리로 종택과 함께 옮겼습니다. |
남강댐 숭상공사로 인하여
라. 삼덕재(三德齋)
바. 삼효각(三孝閣) 충의사가 있는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마을 입구에 있는 삼효각은 농포공 선조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지극한 효를 실천하여 삼대가 정려를 받음으로서 해주정씨 가문을 명륜가로 드높인 정려각입니다. 정려각에 모셔진 분은 15세 역효당육(亦囂堂堉 1718~1769) 과 16세 만성재 현의 (晩省齋 鉉毅 1734~1813) 와 17세 관란 달현(觀瀾 達賢) (78~1849) 공이십니다. |
次 矗石樓韻 | 촉성루 시에 차운하다 |
龍歲兵焚捲八區 | 임진년 병화가 전국을 휩쓸어 |
魚殃最慘此城樓 | 느닷없이 입은 참화 이 성루가 제일 컸네. |
石非可轉仍成矗 | 돌은 구를 수 없이 우뚝하게 솟았는데 |
江亦何心自在流 | 강물은 무슨 마음으로 흐르고 있나. |
起廢神將人共力 | 신명은 사람과 함께 퇴폐함을 복구하려 하고 |
凌虛天與地同浮 | 무한한 공간은 땅과 같이 떠있네. |
須知幕府經營手 | 알겠구나 막부의 경영하는 솜씨가 |
壯麗非唯鎭一州 | 한 고을만 진압하지 않으려는 장한 뜻임을. |
(2) 명암(明庵)공의 촉석루 중수기(矗石樓 重修記)
건물을 지을 때나 수리를 할 때 뜻과 정신이 담긴 내력을 쓴 기문을 걸었는데, 명망있는 분의 글을 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향교나 서원의 기문은 유림의 추천을 받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의 글이므로 기문을 짓는 것 또한 큰 영예로 여겼습니다. 촉석루는 창건 이래 760여년동안 왜구침입, 임진왜란, 6·25로 3번 소실되어 재건하고, 5번의 중수를 하였습니다.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 하수일, 정식(鄭栻), 신호성이 지은 4편의 중수기가 있는데 모두 중의에 의해 추천된 당대의 대표로 선정된 대 문장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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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공(文益)의 증손인 명암(明菴) 정식(鄭栻)공의 중수기는 영조 즉위년인 1724년 중수시에 지은 것으로 당시의 해주정씨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
촉석루중수기(矗石樓重修記)
영남(嶺南)은 산수(山水)가
아름다운 곳인데,
촉석루(矗石婁)는 홀로 제일 가는
누각으로서, 동남지방의 명승으로
그 이름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돌 절벽이 높고 강가 언덕의
대밭은 시원스럽고
두 갈래 물이 가운데가 갈라져
기이한 바위가 층층이 펼쳐져 있다.
이것은 황강(黃岡)의 적벽(赤壁),
백로주(白鷺洲), 상강(湘江),
채석기(采石磯) 등의 명승지와
더불어 과연 그 우열(優劣)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누각에서 장사(壯士)가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과,
바위 위에서는 이름난 기생이
왜적(倭賊)을 죽이고
의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절개는, 중국(中國)의 악양루(岳陽樓),
황학루(黃鶴樓)에서는
일찍이 듣지 못했다.
늠름한 영웅의 기상은
천고(千古)의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서게 만든다.
나는 듯한 용마루 단청을 한 기둥
조각을 한 난간 수놓은 문 등은
사신(使臣)의 임무를 띠고 나온
관원(官員)들이 올라 즐기다가
돌아가기를 잊을 뿐만은 아니다
너른 물결 조그마한 배 달빛 비친 섬
안개 낀 물가는
시인과 도롱이 쓴 낚시꾼들이 즐겨 노닐고
시를 읊으며 다닐 뿐만은 아니다.
돌아보건대,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험한 지형이
이처럼 웅장하니, 정말 이른바
높고 보배로운 산하(山河)인데,
여기에 성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여
원수(元帥)가 여기에 거주하면서
여러 막료(幕僚)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기도 하고,
때론 무예(武藝)를 익히거나
활을 쏘기도 하여
남쪽 지방의 방어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 연하(煙霞)의 뛰어남이나
물과 돌이 아름다운 것으로
논해서 되겠다. 아깝도다!
지난 임진(1592)년의 전란(戰亂)에
흉악한 왜인(倭人)들의 불길에
싹 없어지는 환난에서 다행히 면했으나,
중수(重修)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기둥과 대들보가 기울어지고
단청이 더렵혀지고 벗겨져,
산뜻하던 제도(制度)가 다시는
옛날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자 고을 사람이나 지나는
손들이 개탄하고
서러워한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었으나,
일의 규모는 크고 재물은 부족하여
수리를 할 수가 없었다.
갑진(1724)년 정월 절도사(節度使)
이태망(李台望)공이 남쪽으로 부임하자
바다에는 큰 물결이 일지 않고
절도사 업무상 별다른 일이 없이
평화롭자, 오직 낡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는데,
이 촉석루가 무너지고
부서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우후(虞侯) 박황(朴璜)과 더불어
재물을 모으고 힘을 쌓고 공을 함께
들이고 지혜를 운용하였다.
기둥 문지방 마루판 난간 가운데
썩거나 검게 때 묻었거나 꺾어지거나
부러진 것과 푸른색 노란색
붉은색 흰색 가운데서 낡아
어슴푸레 하게 된 것을 바꾸어
새롭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하니 연하가 빛을 더하고
바람과 달도 광채를 발하였다.
춤추던 교룡(蛟龍)과 헤엄치던 고래도
반드시 강산의 기이한
도움을 기뻐할 것이고,
시골의 노인 거리의 아동들 가운데서
누가 절도사(節度使)의
큰 공적을 칭송하지 않겠는가?
봉황대(鳳凰臺)의 형승(形勝)은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적선(謫仙) 이태백(李太白)의 시는
시인이 아무렇게나 한 말에 불과하고,
적벽(赤壁)의 풍경은 즐겁기는
즐거웠으나 소동파(蘇東坡)의
놀이는 세상 바깥의 고상한
생각에 불과했다.
국가의 정책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되는 바가 있었는가?
뒤에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태백이나
소동파(蘇東坡)의 흥취를 본받아
의기양양해 하지 말고, 반드시
범문정공(梵文定公)처럼
천하의 근심에 먼저 해서 그 근심을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에
나중해서 그 즐거움을 즐기도록 하면,
이 누각은 썩지 않고
나라도 튼튼해질 것이다.
(1) 승지공(大隆)의 글씨
1629(인조7)년 유림들의 중론으로
명필로 이름난 농포공의
둘째아들 승지 대륭(大隆) 공이
바위의 서쪽 면에 전서로
「義巖」이라 쓰고 새겼는데
강과 누각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어
진주8경으로 꼽힌다.
(2) 명암(明庵 鄭栻)선생의 의암사적비(義巖事跡碑) (경남 유형문화재353호) |
이 비는 논개(論介)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진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년경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722년(경종 2)에 명암공이 어우야담의 내용을 바탕으로 비문을 지어 사적비를 세웠다. |
(3) 의기사(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7호)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건립했는데 6.25로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진주 의기창렬회에서 재건하였다. 매천 황현의 시판 한말 진주 기생이었던 산흥의 시판이 걸려 있고 김은호 화백 이 그린 영정은 그린분의 친일이 논란 되고 있다. 영정 뒷편 대형 병풍은 명암(鄭栻)공의 의암사적 비문을 농포공의 14세손 죽헌 정문장(鄭文丈 1943~) 씨가 썼다.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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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비기(義巖碑記)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논개(論介)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만력 계사(1593)년을 맞이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킨 선비인
김천일(金千鎰)이
진주로 들어와 왜적(倭賊)에게
대항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대는 흩어지고 백성들은
다 죽었다.
논개는 짙게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입고서 촉석루 아래 뾰족한
바위 위에 서 있었다.
그 아래는 만 길인데,
바로 강 속으로 들어갔다.
여러 왜적들이 보고서 기뻐했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유독 왜인 한 명이 몸을 빼어
바로 나아갔다.
논개가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왜인이 장차 논개를 유혹하여
끌어당기려고 하자,
논개는 드디어 그 왜적을
끌어안고 바로 못으로
떨어져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 때 관기 가운데서
왜적을 만나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
이 논개 한 사람에 그치지 않으나,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저 관기는 다 음란한 창녀니,
정렬(貞烈)로써 일컬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죽는 것을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여
왜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그 역시 성스러운 임금의
교화를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차마 나라를 배반하고 왜적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고,
특별한 충성은 없었을 것이다.
아름답도다. 슬프도다!”
이 글은 그 당시 사실적인
기록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제 비석에 새기는 글은 중첩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대로 새기고 명(銘)은
이러하다.
| 홀로 뾰족한 그 바위, | |||
特立其女 | 우뚝이 서 있는 여인. | |||
女非斯巖 | 여인은 이 바위 아니면, | |||
焉得死所 | 어디서 죽을 곳 얻으랴? | |||
巖非斯女 | 바위는 이 여인 아니면, | |||
烏得義聲 | 어떻게 의롭단 소리 들으리? | |||
一江高巖 | 한 줄기 강의 높은 바위, | |||
萬古芳貞 | 만고에 꽃답고 곧으리라.
|
사. 진주성 임진·계사 순의비
(壬辰·癸巳 殉義碑)
1592년 임진년 10월
3,800명 군사로
6일간의 혈전에서 왜적 2만명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다음해인 계사년 6월에 9일간의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삼장사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친 7만여 군·관·민의 충절을
이어받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그때의 격전지 진주성 중앙에
세운 추모제단이다.
비문의 글씨는 농포공의
14세손으로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 작가이며
심사위원인
죽헌 정문장(鄭文丈)의 작품이다.
아. 진주 향교(鄕校)의 기문(記文)
(남유형문화재50호)
진주시 옥봉북동에 위치한
진주 향교는
초창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고려 광종때로 추정되는
역사 깊은 향교이다.
건물 구성은
대성전, 동무, 서무, 내삼문,
동재, 서재, 사교당, 풍화루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의에 의해 당대의 학자가 쓰는
기문 중 3편을
해주정씨 선조가 썼습니다.
정문에 해당하는 풍화루의
중수기문은 농포공의 4세손
동야 정상호(東野 鄭相虎)
(680~1752) 선조의 글이며
풍화루 중수상량문은
농포공 4세손
평헌 정상열(萍軒公 鄭尙說)
(65~1747) 선조의 글이며,
강학숙소인 동재와 서재의 기문은
농포공의 9세손
쌍주정세교(雙州 鄭世敎 진사)
선조께서 쓰셨습니다.
<자료> ; 1. 대동보. 2. 해주정씨두원파종회
송산종중 정기승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