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암공 諱 鄭栻의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어 7만의 군관민이 순절하자 義巖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든 논개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임진왜란 이후 진주 사람들의 입으로 논개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논개의 가계와 성장과정 등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억측과 이론이 제기되어 왔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의 충신 효자 열녀를 선정해 편찬한 동국신속강행실도에도 논개의 사적은 빠져 있었다. 이는 논개가 천한 기생 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편찬자들의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논개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광해군 13) “유몽인의 어우야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으며 癸巳年에 왜적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촉석루 아래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1626년(인조 4)향내 유림의 중의로 해주인 농포 정문부의 아들인 鄭大隆이 순국한 바위에 전서체로 ‘義巖’이라 새겼다.
1700년대 초에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순절을 표창토록 주청하여 조정에서 그녀의 가족을 찾아 포상하라는 윤허가 있었다.
그러나 경상우병영에서 경상도 일대에 조사를 하였으나 논개의 행적을 찾지 못하여 포상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진주 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해마다 논개의 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면서 文名이 높던 海州人 명암 鄭栻을 중심으로 꾸준히 논개의 행적을 조사한 결과 권적의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최공(최경회)의시장’ ‘호남절의록’ ‘호남상강록’ ‘호남읍지’ ‘동감강목’ ‘일휴당실기’ ‘매천야록’ 등의 문헌과 고노상전 200년의 구전설화 등에 논개에 관한 기록이 나오면서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유림들이 경상우병사 최진한을 통해 논개의 의로운 뜻을 인정해 줄 것을 조청에 주청토록하여 1722년(경종 2) 예조로부터 관기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의기논개로 현창토록 하여 해주인 명암 정식선생이 지은 비를 세우니 死後 129년이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상황이나 논개의 순국 사적을 상세히 전하고 있으며 그 후 1741년(영조 17)경상우병사 남덕하가 王의 特命을 받아 碑閣을 세우고 ‘義妓論介之門’이라는 賜額을 받았다.
□ 명암 정식(鄭栻)선생 의암비기(義巖碑記) 국역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논개(論介)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만력 계사(1593)年을 맞이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킨 선비인 김천일(金千鎰)이 진주로 들어와 왜적(倭賊)에게 대항하다가 城이 함락되자, 군대는 흩어지고 백성들은 다 죽었다.
논개는 짙게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입고서 촉석루 아래 뾰족한 바위 위에 서 있었다. 그 아래는 만 길인데, 바로 강 속으로 들어갔다. 여러 왜적들이 보고서 기뻐했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유독 왜인 한 명이 몸을 빼어 바로 나아갔다. 논개가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왜인이 장차 논개를 유혹하여 끌어 당기려고 하자, 논개는 드디어 그 왜적을 끌어안고 바로 못으로 떨어져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 때 관기 가운데서 왜적을 만나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 이 논개 한 사람에 그치지 않으나,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저 관기는 다 음란한 창녀니, 정렬(貞烈)로써 일컬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죽는 것을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여 왜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그 역시 성스러운 임금의 교화를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차마 나라를 배반하고 왜적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고, 특별한 충성은 없었을 것이다. 아름답도다. 슬프도다!” 이 글은 그 당시 사실적인 기록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제 비석에 새기는 글은 중첩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대로 새기고 명(銘)은 이러하다.
獨峭其巖 特立其女(독초기암 특립기여)
홀로 뾰족한 그 바위, 우뚝이 서 있는 여인
女非斯巖 焉得死所(여비사암 언득사소)
여인은, 이 바위 아니면 어디서 죽을 곳 얻으랴
巖非斯女 烏得義聲(암비사여 오득의성)
바위는, 이 여인 아니면 어떻게 의롭단 소리 들으리
一江高巖萬古芳貞(일강고암 만고방정)
한 줄기 강의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답고 곧으리라.
□ 의기사(義妓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7호
제2차 진주성 싸움 뒤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중 계사년(1593)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하여 적장을 껴안고 강물에 투신하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여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는 한 목숨을 던져 온 성민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의롭고 장한 기개를 기리기 위해 매년 논개제를 올리고 있으며 근래에 와서는 개천예술제와 함께 진주의 2대 예술행사가 되었다.
論介祠堂은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건립했는데 6.25로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진주 의기창렬회에서 再建하였다.
사당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와 매찬 황현의 시판 한말 진주 기생이었던 산흥의 시판이 걸려있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은 親日派라하여 최근 영정을 다시 제작하였다.
영정의 대형 병풍은 명암 鄭栻公의 의암사적비 碑文을 近來에 傍孫인 죽헌(정문장)이 썼다.
해주정씨 용강공파 종중 및 명암 정식선생 무이정사 유계
사무국장 정태종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