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義巖事蹟碑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1593)에서 城이 함락되자 남강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진주 관기 논개의 행적을 기록한 빗돌이다.
이 빗돌은 경종 2년(1722)에 세운 것으로 진주 선비 明庵 鄭栻이 碑文을 지었다.
다음은 鄭栻先生(朝鮮 後期 선비, 海州鄭氏, 號 : 明庵)의 義巖事蹟碑(國譯) 全文이다.
【義巖事蹟碑銘】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논개(論介)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만력 계사(1593)년을 맞이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킨 선비인 김천일(金千鎰)이 진주로 들어와 왜적(倭賊)에게 대항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대는 흩어지고 백성들은 다 죽었다. 논개는 짙게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입고서 촉석루 아래 뾰족한 바위 위에 서있었다. 그 아래는 만 길인데, 바로 강속으로 들어갔다. 여러 왜적들이 보고서 기뻐했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유독 왜인 한 명이 몸을 빼어 바로 나아갔다. 논개가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왜인이 장차 논개를 유혹하여 끌어당기려고 하자, 논개는 드디어 그 왜적을 끌어안고 바로 못으로 떨어져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 때 관기 가운데서 왜적을 만나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 이 논개 한 사람에 그치지 않으나, 그 이름을 잃어 버린 경우 가 많다. 저 관기는 다 음란한 창녀니, 정렬(貞烈)로써 일컬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죽는 것을 자기 집에 돌아 가는 것처럼 하여 왜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그 역시 성스러운 임금의 교화를 받은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다. 차마 나라를 배반하고 왜적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고, 특별한 충성은 없었을 것이다. 아름답도다. 슬프도다!”
이 글은 그 당시 사실적인 기록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제 비석에 새기는 글은 중첩
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대로 새기고 명(銘)은 이러하다.
獨峭其巖(독초기암)홀로 뾰족한 그 바위,
特立其女(특립기여)우뚝이 서 있는 여인
女非斯巖(여비사암)여인은 이 바위 아니면,
焉得死所(언득사소)어디서 죽을 곳 얻으랴?
巖非斯女(암비사여)바위는 이 여인 아니면,
烏得義聲(오득의성)어떻게 의롭단 소리 들으리?
一江高巖(일강고암)한 줄기 강의 높은 바위,
萬古芳貞(만고방정)만고에 꽃답고 곧으리라.
※ 歷史的 意義 : 이 碑記는 論介가 官妓에서 義妓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그 예우가 격상되면서 義妓祠가 설치되고 論介祭 등 논개관련 다양한 행사가 국가 차원에서 치뤄지므로서 그의 충절이 길이 빛나도록 하는데 역사적 초석을 마련하였다.
義妓論介之門(內) 義巖事蹟碑銘(元本)
의기논개지문(1741년, 경상우병사 남덕하)
"의암"시는 명암집 1권(한시)편에 "의암비기"는 명암집 5권 (기)편에 실려 전해지고 있읍니다.
덕산 무이정사 유계 사무국장 정태종(용강공파, 해주정씨 21세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