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지역의 선조 발자취

                                                    진주(晋州)지역의 선조 발자취

1. 해주 정씨가 진주에 세거한 내력

진주에 세거하고 있는 해주정씨는 주로 충의공 농포 정문부(忠毅公 農圃 鄭文孚 1565~1624)과 그 아우 용강 정문익(龍岡 鄭文益 1568~1639)후손이다.

농포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시다. 자는 자허(子虛), 농포는 호이다. 서울출신. 아버지부사 ()이시다. 1585(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역임하고 1590년 사헌부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함경도병마평사(약칭 북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을 순찰하였다.

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회령의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황혁(黃赫)등을 잡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최배천(崔配天)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각 진의 수장(守將)조사(朝士)들과 합세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먼저 국경인국세필(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서 명천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대승하고, 쌍포(雙浦)전투와 이듬해 백탑교(白塔郊)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여 후세의 사가들이 南忠武 北忠毅(남쪽은 충무공 이순신, 북쪽은 충의공 정문부)라고 한다. 공은 첫째, 북으로 들어간 왜적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억센 군대들과 싸워야 했고, 둘째, 왜적에게 부역하여 우리 왕자와 대관들을 사로잡아 주고서 조국에 반역 행위를 하는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 악한 무리들을 지혜로써 무찔러야 했으며, 셋째, 우리의 어려운 틈을 타서 침구해 오는 북쪽 오랑캐들과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이같이 한때에, 한 칼로써 삼중 전투를 감행하고, 또 능히 모두 다 승첩을 거두었던 것이야말로 임진란 전체 역사를 통하여, 다른 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위업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공의 승첩은 국가의 도움이란 추호도 없이 오직 충의로 부르짖어, 흩어진 민심 속에서 불러일으킨 민간 의병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 상관이던 감사 윤탁연(尹卓然)의 시기 질투로 그 공로를 제대로 포상 받지 못하였다.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 길주목사 안변부사 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판결사 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 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에 이어 다음해 예조참판, 이어서 장단부사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10(광해군 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남원부사가 되고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북인(北人)의 난정(亂政)을 통탄하여 나가지 않았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있던 중 1624(인조2) 초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시()로 인하여 박홍구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고문 받던 끝에 별세하였다.

뒤에 함북 지방민의 송원(訟寃)과 임란이후에 북평사를 역임한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 외재 이단하(畏齋 李端夏1625~1689) 부자의 상소와 후손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사후 43년 만에 신원(伸寃)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셨다. 그 후 증손 주부 삼(主簿 杉 1634~1708)공이 시호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1714년에 충의(忠毅)의 시호가 내려졌다.

경성(鏡城)의 창렬사(彰烈祠), 회령의 현충사(顯忠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 일명 崇烈祠)에 제향되고 근래에 이르러 다시 진주(晋州)의 충의사, 의정부의 충덕사(忠德祠)에 제향(祭享)되셨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약탈되어 동경 야스쿠니신사로 옮겨져 방치되었다가 2005. 10. 20 황국하여 북한에 인도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1709년 곤륜 최창대(崔昌大)선생이 농포공의 사적을 밝혀 함경북도 길주에 세운 것이다.

 

농포공은 역모라는 무고로 60고령의 몸에 가해진 4번의 압슬을 포함한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16241118일 옥중에서 돌아가시기 전 두 아들에게 너희들은 벼슬할 생각은 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 은거하며 살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그 유언에 따라 공의 장남 대영(大榮 執義) 차남 대륭(大隆 承旨)과 공의 동생 용강공 문익(文益)= 위 진주지역 선조 발자취 누름

Comments

정 대근 2018.03.12 20:45
진주(晋州)지역의 선조 발자취  고향이 그리워도 못오는신세 이젠서울에 살아요 진주엘랑 오지를 마세요
업로드 기능이 대단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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