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歷代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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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박(鄭樸) 1621-1692 자는 자문(子文)이다. 지돈령부사를 지낸 해풍군 효준(孝俊)의 넷째 아들로 1652년(효종 3) 증광시 병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에 발탁되었다. 1657년 성균관 전적, 1661년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여 자의대비 복제문제로 남인과 서인간의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남인의 입장을 옹호하였는데 이 일로 서인의 미움을 받아 이후 벼슬길이 평탄하지 않았다. 1667년 통례원 우통례, 1668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 왔으며 1672년 강계부사로 부임하였다. 1674년 동부승지, 1677년 경상도 관찰사, 1678년 진위부사(陳慰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돌아와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쫓겨나자 공도 광주목사로 전임되어 이후 기사환국 때까지 계속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1689년 사간원 대사간, 한성부윤, 강화유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691년 공조참판으로 옮겼다. 1692년 병을 무릅쓰고 아버지의 기제사에 참여하여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뜨셨다.

 

정봉현(鄭鳳賢) 1794~1856 자는 덕서(德瑞) 우후 선의(善毅)의 아들 1816년 무과에 올라 칠원현감을 역임하였다. 항상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밤마다 미행하여 그들의 질고와 정황을 살폈다.

 

정분(鄭汾) 통례 기(旗)의 아들 1423년(세종) 문과에 올라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으며, 뒤에 이름을 숙(淑)으로 고쳤다.

 

정붕(鄭鵬) 1469(예종 1)~1512(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선산출신. 현감 철견(鐵堅)의 아들이며, 석견(錫堅)의 조카이다.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정자ㆍ지평ㆍ정언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무오사화ㆍ갑자사화로 많은 문신들로 주살(誅殺)을 당할 때 현명하게 처신, 몸을 보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교리에 복직되어 상경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정승 성희안(成希顔)의 건의에 따라 왕의 특지로 부름을 받았으나 홍경주(洪景舟) 등 간신배가 조정에 있음을 보고 낙향하자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3년 만에 임지에서 별세하였다.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의정 성희안과 젊어서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길재(吉再)ㆍ김숙자(金叔滋)의 학통과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황(李滉)이 일찍이 그의 학문이 깊다고 칭송하였다. <안상도 案上圖>를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으며, 성리학자인 박영(朴英)이 그의 문인이다.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봉향되었다.

 

정사겸(鄭仕謙) 1520~? 자는 수행(守行). 참찬관 필(弼)의 아들. 전의 현감(全義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석(鄭晳) 1619-1677 자는 백야(白也), 호는 악남(岳南)이다. 지돈령부사를 지낸 해풍군 효준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명이 있었다. 1642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9년(인조 20) 문과 별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유에 임명되고 곧이어 추천으로 승정원 주서에 발탁되었다. 이때 <희우시(喜雨詩)>를 지어 임금의 칭찬을 듣고 범가죽을 하사받았다. 1654년 홍우원이 강빈의 신원과 두 동생의 죄를 용서할 것을 청하다 죄를 입자 이를 변론하다 영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돌아와 세자시강원 필선을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었다. 1668년 홍문관수찬, 이듬해 동래부사로 부임하였고 들어와 1672년 장례원 판결사, 좌ㆍ우승지, 병조참의,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676년 잘못 기술된 인조반정 기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변무부사로 중국에 갔다 돌아와 공조참판, 도승지, 한성부우윤 겸 홍문관 부제학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677년 쉰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시문이 전아하고 웅장 화려하여 옛사람의 기풍이 있었으며 저서로 <<岳南集>> 1책이 세상에 전한다.

 

정석견(鄭錫堅) ? ~1500(연산군 6)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 유공(由恭)의 아들이며, 사림파 학자인 붕(鵬)의 작은아버지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안현감ㆍ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483년 천추사(天秋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5년 이조좌랑에 올랐다. 다음해 사헌부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원사(元史)를 강(講)하는 대신, 경서(經書)를 강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고, 곧 이조정랑으로 옮겨 보덕 허침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刪定)하였다. 1489년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때 유자광(柳子光)이 장악원제조로 임용되자 장악원제조는 덕망이 있는 자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이유로 체직을 요청하였다가 성균관사예로 전직되었으며,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밀양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강경서(姜景敍)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천거되었으며, 의정부 사인의 직에 있으면서 사유에 뽑혔다. 일시 김해부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그해 제포(薺浦)에 왜인과 본국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문제가 크게 되자 경상도 경차관이 되어 제포에 파견되었으며, 그때 본국인의 심문을 잘못하여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의 참지ㆍ참의를 역임하였고, 2년 후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하여 파직 당하였다. 김종직ㆍ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성리학을 강론하였고, 성종 때 유도인(有道人) 13인을 천거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에 들었다. 청빈하여 앞에서 이끄는 종이 없이 다니니 ‘산자관원(山字官員)'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선산 경락사(景洛祠)에 제향되었다.

 

정선(鄭) 1546~ 1618 자는 자정(子正) 호는 퇴휴당(退休堂) 사직 언충(彦忠)의 아들. 1592년 왜변이 나자 문두원(文頭院)에 의병소를 설치하고 한남에 격문을 보냈다. 이 때 조헌 고경명이 그 소식을 듣고 “한동에도 또한 사람이 있었는가 정공은 참으로 의사로다” 하였다. 여주 이천 광주에서 300여명이 백의종군하고 향병을 규합하여 군세가 점점 진작되고 자주 왜적을 쳐서 승리하였다. 북병사 정문부가 북관의 반민과 왜적을 치다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족숙 또한 창의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덕행이 아니랴”고 하였다. 군공으로 선무원종3등 공신에 선록되고 예빈시 부정을 역임하였다.

 

정선(鄭選) 1768 ~1821 초휘는 선(璇) 자는 여칠(汝七) 호는 화재(和齋) 유성(惟城)의 아들 생부는 군수 유철(惟轍) 정조(正祖) 1795년에 무과(武科)에 올라 바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1796년에는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와 내금위(內禁衛)로 옮겼고, 1797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로 임명되었다. 8척이 넘는 장신에 음성이 천둥 소리와 같고 안광(眼光)이 횃불 같았으며 여력(膂力)이 뛰어나 철여의(鐵如意)를 부러뜨렸다. 임금이 훈련원에 거둥하여 뭇 신하들을 모아놓고 무예(武藝)를 시험할 때, 공이 철궁(鐵弓)을 당겨 원목(院木)을 향해 발사하니, 아름드리나무가 시위소리를 따라 부러져 그 소리가 온 원내(院內)를 진동시켰다. 임금이 크게 칭찬하는 한편, 어전(御前)에서 공의 이름을 선(選)으로 하사하고, 그날로 사헌부 감찰 겸 호위장(司憲府監察兼扈衛將)에 임명하였다. 마침 권문(權門)에서 세력을 믿고 불법을 자행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공이 감찰의 규례를 들어 그 집대문을 묵쇄(墨刷)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오늘에 다시 총마어사(驄馬御使:후한때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桓典을 말함)를 구경하게 되었다.』하였다. 그 뒤부터 시기하는 자가 많아지고 두려워하는 자가 집중되어 경망(輕妄)하다는 죄목으로 호남에 정배(定配)되었다가 번암 채제공(蔡濟恭)의 주청으로 풀려났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지기(志氣)가 풀려 세상에 대한 생각이 없어져서 고향으로 돌아와 구원(九原)에 뜻을 붙이고 책상에 그득한 금서(琴書)와 정원에 심어둔 꽃과 대나무로 한가로운 의취를 즐겼다. 1802년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금 수천관과 곡식 수백곡을 털어 향리(鄕里)의 빈궁한 자를 구제하였으므로 그 송덕비(頌德碑)가 온 경내에 자자하였다. 1820년에 훈련원 정(訓鍊院正)에 임명되고, 1821년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었다가 바로 첨중추 겸 충장위장(僉中樞兼忠壯衛將)에 임명되어 성근(誠勤)을 다하였다.

 

정선의(鄭善毅) 1767~1823 자는 양오(養吾) 호는 한옹(閑翁) 처사 식(埴)의 아들. 1800년에 무과에 올라 1812년 홍경래의 난 당시 선전(宣傳)으로서 토벌을 자원하였으나 조의(朝議)에서 시종지신으로서 잠시도 연곡(輦 임금이 타는 수레)을 떠날 수 없다고 하여 불허하자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1820년 안주 우후겸 토포사(安州虞侯兼討捕使)에임명되었다.

 

정성(鄭晟) 정당문학 윤경(允卿)의 아들 고려조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증직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충선왕 4년 5월 임인(壬寅)에 왕이 대호군으로 치사한 정성(鄭晟)을 보내 역대실록을 송환(送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수경(鄭守慶) 현감 담(憺)의 아들 조선 중종 무렵에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수호(鄭壽豪) 1508-1569 자(字)는 기로(耆老). 참찬관 필(弼)의 아들. 진사에 입격하여 안동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순민(鄭淳民) 1755 - 1805. 자는 야수(野叟)이고 1795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 1796년 가주서, 1802년 감찰 지평, 1804년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정술조(鄭述祚) 1711-1788 자는 효선(孝善) 사호(賜號)는 삼춘당(三春堂). 동지중추부사 진형(震衡)의 아들 생원으로 1750년 문과에 급제하고 1756년 지평(持平)으로서 송시열 송준길 두 선생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소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1759년 세자시강원과 지제교에 선발되었고, 1766년 중시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승급하고 1784년(정조8)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제수되어 매일 세자를 모시고 강연하였다. 1787년(정조11)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다음해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하다.

 

정숭의(鄭崇義) 대제학 여(旅)의 아들 조선 초에 희천 군수(熙川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승(鄭勝) 1579~1632 자는 길보(吉甫) 오정공 용(鎔)의 아들. 1617년(광해군 9) 문과에 급제 서궁분승지(西宮分承旨)를 역임하였다.

 

정시선(鄭時善) 1767 - 1835. 자는 자중(子中) 호는 암경재(岩耕齋)이다. 179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01년 정언, 1802년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으며 유고가 있다.

 

정식(鄭植) 1615(광해군 7)~1662(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교(白郊)라 하였다 지돈녕부사 해풍(海豊君) 효준(孝俊)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진경(李眞卿)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출중하여 1642년(인조 20)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발탁되고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유생들을 위해 바른 말로 다투다가 거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 대신들의 주청에 따라 곧 조정에 들어와 시강원문학, 사헌부의 지평ㆍ장령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남양부사로 부임하였다. 질병으로 자리를 옮겨 사복시와 상의원(尙衣院)의 정(正)에 임명되었으나 1662년 감기로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 중휘가 참판에 오르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해원군(海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인심이 후덕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았다.

 

정식(鄭栻)) 1683-1746 조선 영조때의 지사. 자는 경보(敬甫) 호는 명암(明庵) 동지(同知) 대형(大亨)의 손자.어려서 부모를 잃고 재종형 노정헌 구(露頂軒 構) 밑에서 공부하여 학문에 정통하였다.8세에 벌써 글을 지었고 젊어서 과옥(科屋)에 나가 호담암(胡澹庵 : 胡詮)의 척화소(斥和疏)를 읽고 비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드디어 유건을 찢어버리고 패랭이를 쓰고 명산대천으로 돌아다니고 집에 들어와서는 경사를 공부했다. 만년에 두류산의 무이구곡에 집을 짓고 제갈량(諸葛亮) 주희(朱憙)의 초상을 모사 봉안하여 놓고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홀로 즐겼다. 생활이 극도로 가난하여 고사리와 솔잎으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태연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고 유집 5권이 있다. 최근 산청의 명덕사에 제향되었다.

 

정신(鄭愼) 1538(중종33) ~1604(선조37). 자는 군성(君省) 1561년 사마시에서 생원과 진사에 입격하고 1565년 율곡과 동방으로 을과 1위로 급제하였으나 오랜 기간 한직을 전전하다가 임란 전에야 겨우 풀려 내자시정, 대사간을 역임하고 아들 농포 정문부의 공으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정언(鄭琂) 고려(高麗) 때 소부 소윤(少府少尹)을 지내고 정헌대부(正憲大夫)ㆍ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언각(鄭彦慤)1498(연산군 4)~1556(명종 11).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근부(謹夫). 진사 희검(希儉)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537년 박사에 이어 정언ㆍ지평ㆍ장령ㆍ교리ㆍ응교ㆍ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응원정ㆍ검상ㆍ사인 등을 지냈고,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시 서울 양재역(良才驛)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등이 권세를 자행(恣行)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이로 인하여 을사사화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봉성군(鳳城君 : 중종의 아들)ㆍ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등을 죽이고, 권벌(權橃)ㆍ이언적(李彦迪) 등 20여명을 유배시킴으로써 윤원형(尹元衡)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도승지ㆍ판결사를 거쳐 1551년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물러났다가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다시 등용,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상도 관찰사ㆍ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56년 동지중추부사 재임 중 병으로 쉬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여(鄭餘) 예조판서 윤진(允珍)의 아들 조선 초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여(鄭旅) 판서 강(崗)의 아들 1408년( 태종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지성균관춘추관사(知成均館春秋館事) 등을 지냈다.

 

정여충(鄭汝忠) (1539~1608) 자는 공서(公恕), 호는 매창(梅窓), 교위 승선(承先)의 아들. 생부는 승윤(承尹), 1573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593년 왜란시에 황해도 연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당시 연안부사 이정암(李廷馣)과 합세하여 약 5,000명의 군사로 화공법으로써 약 7배나 되는 왜적을 격퇴하였다. 당시 화공법은 마을 부근민가에 청솔가지를 쌓고 불을 놓아 연기를 수일간 배출케 하고 아군 복장을 흙색으로 입고 눈만 내놓고 창을 가지고 집 한 채에 수십명이 매복하고 있다가 왜적이 나타나면 출격하여 격퇴시키는 전법이다. 이정암의 주청으로 3등공신이 되고 우봉현령에 제수되었다.

 

정역(鄭易) ? ~1425(세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순지(順之), 호는 백정(柏亭). 아버지는 정용낭장 판예의사사(判禮儀司事) 윤규(允珪)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설문우(薛文遇)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장인이다. 1383년 시승(寺丞)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태종 이방원과 동방이므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좌정언ㆍ교주도안렴부사(交州道按廉副使)ㆍ사헌부지평ㆍ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등을 역임하고, 1411년(태종 11)에 한성부윤으로 정조부사(正朝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대사헌이 되었다. 1414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예조ㆍ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1416년 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419년(세종 1)에 판한성부사ㆍ좌찬성, 다음해에 호조판서를 거쳐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이 되었다. 사림의 중망(重望)으로 4조(朝)를 섬기는 데 한결같았고, 내외의 자손 수십명에 복록을 겸비하였으나 더욱 스스로 겸손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정연경(鄭延慶) 자는 흥조(興祚) 참의 침()의 아들. 조선 성종조에 음보로 건원릉 참봉,상서원 직장,마전군수를 역임하면서 최상의 치적으로 통정의 품계에 올라 철원부사에 제수되었다.

 

정염(鄭恬) 동지 충석(忠碩)의 아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낭천 현감(狼川縣監)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정영(鄭韺) 1610~ 1679 자는 화숙(和淑) 증 병조참판 사중(思中)의 아들 1635년 갑과에 뽑혀 인의(引儀) 참군(參軍)에 제수되고 병자년(1635) 겨울에는 감찰로서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서총융사 이시백(李時白)의 막하에 있었다. 성위에 서서 방어하다가 오랑캐의 칼에 맞아 부상을 당하였으나 상처를 싸매고 더욱 분발하여 종일 화살을 쏘았으므로 특별히 훈련원 정(訓練院 正)에 제수되었다가 창성부사에 승진되고 가을에 순천영자에 제수되었다가 군어(軍御)에 제수되고 이윽고 춘천부사 경원부사 길주부사를 거쳐 호남의 좌우수사(左右水使)로 승진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후에 충청수사에 제수되었다가 경상우병사로 옮겼다. 얼마 안되어 그만두고 돌아와 “금의로 고향에 돌아오니 이미 최고의 영행(榮幸)이다. 만약 만족할 줄 알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뒤에 총관(摠管)으로 부르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8척 신장으로 기우(器宇)가 헌앙하였으며, 일생동안 소인을 미워하고 권귀에 아부하지 않았다.

 

정운기(鄭運紀) 1714 - 1752. 자는 선행(善行)이고 호는 관재(觀齋)이며 아버지는 참판 필녕이다. 1738년 사마시에서 진사로 입격하고 1751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역임하였다.

 

정운유(鄭運維) 1704(숙종 30)~1772(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지국(持國)ㆍ참판 필녕(必寧)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생원시를 거쳐 175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장령ㆍ승지를 지냈다. 그 뒤 여주목사로 이속(吏屬)과 결탁하여 전세를 포탈하는 자를 응징하고, 흉년이 들자 징세를 감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기민(饑民)에게 나누어 주는 등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이 높았다. 이어 대사간ㆍ한성부우윤ㆍ도승지ㆍ대사헌을 지내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정운제(鄭運躋) 1740 - ?. 자는 성오(聖梧)이고 참찬 익(木益)의 증손이며 현감 집녕의 아들이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를 거쳐 현감을 역임하였다.

 

정운홍(鄭運弘) 1686~1729. 자는 계의(季毅) 진사 덕녕(德寧)의 아들, 참찬 익(木益)의 증손으로 1721년 생원에 입격하였으며, 1728(영조4)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역임하였다.

 

정원희(鄭元禧) 1527~1568 자는 경수(景綬). 조선 명종조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해령군(海寧君)에 책봉되었다.

 

정유공(鄭由恭) 조선 초기의 문신 영동정 희언(希彦)의 아들. 교도관에 제수되어 생도를 교유하는데 정성과 직무를 다하여 그 명성이 널리 전파되어 조정에 까지 알려지자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로 승진하였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가 “감문(甘文: 경북 김천)의 사람들이 본디 술주정만 일삼고 학업에 힘쓰지 않다가 정씨가 주거한 이후로 후학을 권장하고 풍속을 바로 잡았다”고 하였다.

 

정유빈(鄭有彬) 1645 - 1691. 자는 욱재(郁哉)이고 부는 시익(時益)이다. 음직으로 출사하여 선교랑으로 1689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지냈다.

 

정유징(鄭有徵) 1646 - 1698. 자는 군원(君遠)이고 광릉처사 찬(纘)의 손자이다. 서경과 역경에 밝아 직부전시를 보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83년 보령현감, 1691년 장령을 역임하였다.

 

정유철(鄭惟轍) 1743~1799. 자는 명준(明準) 윤신(胤新)의 아들 1784년 무과에 오르고 선전관으로 있다가 운산(雲山)군수로 나가 백성을 다스리면서 항시 선조 신당 정붕(新堂 鄭鵬)선생의 “잣은 높은 산봉우리 위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속에 있다”는 구절을 좌우에 써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경계를 삼았다.

 

정윤경(鄭允卿) 고려조(高麗朝)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정윤경(鄭胤慶) 자는 향수(鄕數). 생원 변()의 아들 조선 전기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윤규(鄭允珪) 고려 때 정용낭장(精勇郎將) 판예의사사(判禮儀司事)을 지냈다.

 

정윤진(鄭允珍) 고려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을경(鄭乙卿) 자(字)는 선보(善輔), 호(號)는 해정어수(海亭漁叟). 부사 인노(仁老)의 아들. 조선초기에 남양부사(南陽府使)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정의조(鄭毅祚) 1739 - 1797. 자는 홍중(弘中)이고 단천부사 운일의 아들이다. 1787년 집춘문의 감제에서 으뜸을 차지하여 직부전시를 보아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으로 수레로 운반하는 제도를 수원에 실시하도록 건의하였으며 1793년 장령을 역임하였다.

 

정익(鄭榏) 1617~1683 자는 자제(子濟), 호는 욱헌(旭軒)이다. 아버지는 해풍군 효준으로 지돈령부사를 지냈다. 해풍군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 문리가 트여 163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42년(인조 20) 식년과 명경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성균관을 거쳐 1648년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문학, 사헌부 지평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655년 황해도 연안부사로 나가 남대지(南大池)를 개수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659년(효종 10)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으나 궁가(宮家)의 사유지 불법 조성을 간언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효종이 죽자 고부승습청시사(告訃承襲請諡使)로 중국에 사신 갔다 왔으며 동부승지, 장례원 판결사, 병조참의를 역임하다가 1663년 풍덕부사로 나갔다. 1677년 형조참의,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고 1670년 하정부사(賀正副使)로 중국에 갔다와서 형조참판,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강화유수, 1676년 도승지, 병조판서, 이듬해 지중추부사, 이듬해 한성부윤,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적이 일어나자 1670년 하정부사로 갔을 때의 일에 관련되어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가 1682년에 풀려났다. 이때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동대문 밖에서 한가로이 지내다 전염병으로 1683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익조(鄭益祚) 1724 - 1799. 자는 효겸(孝謙)이고 호는 겸겸재(謙謙齋)이며 여우자 면(勔)의 증손이다. 1750년 사마시에서 진사에 입격하고 1777년 문과에 급제하여 1780년 정언을 비롯하여 지평, 사간을 역임하고 광주부윤으로 나갔다가 1794년 가선대부로 호조참판을 지냈다.

 

정인로(鄭仁老) 고려 판중추 성(晟)의 아들. 1443년(세종 2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감찰장령(監察掌令)ㆍ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지내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정인서(鄭麟瑞) 1587~1617. 자는 사인(士仁) 1603년 전시에 합격하여 한원(翰院)에 선발되었다가 국자전적에 올랐고 홍문관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역임하고 1607년 봉상판관이 되고 1615년 진주제독(晋州提督)이 되었다.

 

정일각(鄭一覺) 찬경(纘慶)의 아들 조선 전기에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일녕(鄭一寧) 1666~1718 자는 일지(一之), 1684년 음직으로 사축서 별제, 공조좌랑, 1686년 문화현령, 1689년 진사에 입격하고 사릉참봉, 상의원 직장을 역임하였으며, 1707년 문과에 급제하고 숙종때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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