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歷代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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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鄭) 1635~1672 자는 계직(季直)이다. 해풍군 효준의 막내아들로 16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 서학교수, 예조와 병조의 낭관을 역임하였다. 1670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여 서장관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업무를 수행하다가 병을 얻어 머물다가 이듬해 고국으로 돌아오던 중 사령에서 세상을 뜨셨다. 판서 임상원, 지돈녕부사 윤심과 두터운 친교가 있었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정조(鄭造) 1559(명종 14)~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시지(始之). 승지 척(惕)의 손자로, 문영(文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순(洪純)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생원ㆍ진사 양시에 합격하고,160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다시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데 적극 가담하였고, 다음해 부제학ㆍ대사성을 거쳐 1619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1621년 형조참판을 지내고, 1619년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수양세고』와 『허암유고』를 간행하였고, 1622년 부제학ㆍ동지의금부사로 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역전되면서 동생인 의주부윤 준(遵), 대사간 규(逵)와 함께 화를 입었다.

 

정종(鄭悰) 143?~1461(세조 7). 조선 초기의 문신. 참판 충경(忠敬)의 아들. 1450년(세종 32)에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한 뒤 영양위(寧陽尉)에 책봉되었고, 단종이 즉위하자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55년(단종 3)수양대군의 제거를 도모하였던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와 친교가 있었다 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해에 수양대군이 즉위하였는데,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 하여 경기도 양근(陽根) 수원 통진에 이배 되었으나, 1456년(세조 2) 사육신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다시 광주(光州)로 옮겨졌다. 1461년 승려 성탄(性坦)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 하여 사사되었다. 그와 함께 유배되어 관비(官婢)가 된 경혜공주가 적소에서 아들을 낳자, 세조가 미수(眉壽)라 이름 하였다. 뒤에 미수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봉해지자 영의정 영양부원군에 추증되고 헌민(獻愍)의 시호를 받았다. 영월의 장릉(단종묘)과 공주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정종현(鄭宗鉉) 1804~1871 자는 치굉(致宏) 진(璡)의 아들 1834년 무과에 오르고 부사과 사헌부감찰을 거쳐 선전관에 임면되었다. 1856년 곽산(廓山)군수로 나가고 1857년에는 부령부사로 이임되었다. 1864년에는 청주영장에 임명되어 정성스럽고 곧은 성격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다스리니 명령이 실현되고 향약이 새로 각 방에 반포되어 단속이 엄격하니 이방들이 다 두려워 하였다. 군정을 강화하여 언제나 쓰일 수 있도록 하였다. 외직에서 항상 성적이 상위에 들었으므로 부령에 있을 때 수의(繡衣: 암행어사)가 보고하기를 “성직(誠直)한 성격으로 근려(勤勵)한 치도를 행하여 규령(規令)이 실현되고 향약이 새로 각 방에 반포되어 단속이 엄격하니 이속(吏屬)이 다 초정(初政)에 무서워했다”라고 하였다. 1866년 양이가 강화를 침범하자 고향에서 향곡에 통문을 날려 군량을 모아 도적을 토벌할 것을 간절히 호유하였다.

 

정종형(鄭從衡) 자는 평숙(平叔) 참봉 계경(繼慶)의 아들 조선전기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준(鄭遵) 1580(선조 13)~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행지(行之), 문영(文英)의 아들이며, 조(造)의 동생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광해군 때 다시 설치된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지평ㆍ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교리ㆍ이조정랑 등을 거쳐 1621년에는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명 청의 정세를 탐지하여 광해군의 외교에 크게 기여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의 총신(寵臣)이었던 죄로 의주에서 반정으로 살해되었다.

 

정준교(鄭準敎) (1881~1946) 자는 태규(泰奎), 호는 서주(西州), 광승(光升)의 아들, 생부는 광린(光麟). 1910년 조선이 일본제국에 합방되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서울 만주 등지를 전전하다가 1919년 서울의 손병희 선생 진주의 김재화, 박진환, 강달영, 심두섭, 이강우, 박용근, 강상호 등 동지들과 손잡고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여 1919. 3. 19. 드디어 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징역 3년을 복역하였으며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다.

 

정중만(鄭重萬) 1658~ 1732 자는 여일(汝一) 호는 백석(白石) 필선 식(植)의 아들 14살에 현종이 인평대군의 아들과 혼인하게 하였고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젊어서부터 글씨를 잘 써서 대권안의 여러 편액을 썼다. 1689년 사옹원 직장이 되었다가 익위사 부솔(副率)로 옮겼다. 이듬 해 처남들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철산으로 귀양 갔다가 1694년에 풀려 돌아와 위솔랑(衛率郞) 형조감(刑曹監)으로 승진되고 안음현 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껴 쓰고 남는 것으로 제민고(濟民庫)를 처음 만들었다. 황간현감으로 나가 다스리는 일이 가장 뛰어난지라 청도군수로 승진되었다. 이어 함열 양근 진산의 각 군수와 의금부 도사 형조정랑 충훈부도사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전라도 찰방을 역임하였다. 1728년 한성주부로 원종공신에 참여하여 아버지 필선공을 이조판서로 추증 받게 했다. 또 공조정랑과 사도시 첨정을 지냈다. 현재 정곡빌딩 동·서관 앞의 鄭谷이라는 표석은 공의 필적이다.

 

정중휘(鄭重徽) 1631-1689.의 자는 신백(愼伯), 호는 돈곡(敦谷)이다. 세자시강원 필선을 지낸 해원군 식(植)의 맏아들. 165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에 발탁되고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1662년 사헌부 지평, 1665년 강원도 도사, 1672년 세자시강원 필선을 역임하고 1675년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들어와 좌승지, 도승지로 승진하고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의 일에 관련되어 양주로 귀양 갔다. 1678년 사면되어 장례원 판결사,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1680년 해흥군의 군호를 받았다. 그러나 경신대출척으로 벼슬길도 막혀 집안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 광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의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행해지자 이를 변론하다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곧 형조참판에 임명되어 인현왕후 폐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유생들에게 각자 글을 지어 올리게 하는 등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였으나 집권층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곧이어 경기도 관찰사, 동지의금부사,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다 1697년 별세.

 

정지선(鄭止善) 1789 - 1850. 자는 여정(汝定)이고 호는 국헌(菊軒)이며 진사 명의의 아들이다. 184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정언과 장령을 역임하였다.

 

정지신(鄭趾新) 1722~ 1787 자는 군우(君又) 부사 찬(巑)의 아들 1742년 무과에 급제하여 1743년에 해남에 나갔다가 1745년에 곡성으로 이임되었다. 얼마 후에 횡성으로 부임하여 가는 곳마다 선치를 베풀어 특별히 상주진(尙州鎭) 중영장 겸 토포사(中營將 兼 討捕使)에 제수되었다.

 

정지익(鄭之益) 1599 - 1678. 자는 자겸(子謙)이고 생부는 첨지중추부사 찬(纘)이다. 1630년 사마시에서 생원에 입격하고 1633년 문과에 급제하여 1647년 성균관 직강 1677년 예빈시 정으로 정심(正心), 보민(保民), 양병(養兵), 택용염리(擇用廉吏)에 대하여 상소하였으며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정집녕(鄭輯寧) 1690~1749 자는 방경(邦卿)이고 참찬 익(木益)의 손자이다. 1725년 문과 전시에 직부하여 급제하고 1733년 낭청을 거쳐 판관을 역임하였다.

 

정찬(鄭巑)1759~ 1811 자는 경천(擎天) 위세(緯世) 1785년 무과에 오르고 1789년에 선전관이 되었다가1793년에 무신 겸 선전관이 되었다. 1795년 경상도의 우후로 절충장군에 승진되었다가 박천(博川)으로 나가 은위를 베풀었고 단천 경흥을 차례로 다스리면서 예의로써 가르치고 성경으로써 인도하여 매번 수의(繡衣)의 표창과 이민(吏民)의 거사비(去思碑)가 있었다.

 

정척(鄭惕) 1517(중종 12)~1596(선조 2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길(君吉), 호는 쌍곡(雙谷)과 행촌(杏村), 호조참판 언각(彦慤)의 아들이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ㆍ교리ㆍ정언ㆍ지평ㆍ장령ㆍ사간ㆍ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 양사의 탄핵을 받아 상주목사에서 파직 당하였다가, 1592년(선조 25)에 풀려나 중추부첨지를 지냈다.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정천화(鄭天和) 1792 - ?. 자는 도원(道源)이고 호는 산남(山南)이며 석치 철조의 손자이다. 1828년 생원에 입격하고 1855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부수찬과 교리를 거쳐 1862년 대사간을 역임 1873년 도총부 도총관, 이어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정철견(鄭鐵堅) 자(字)는 강수(剛叟), 호(號)는 송정(松亭). 교도 유공(由恭)의 아들. 현감을 지냈다. 김종직 김굉필 등과 내왕하고 도학과 문장으로 추앙 받았다.

 

정철조(鄭喆祚) (1730~1781) 자는 성백(城伯), 호는 석치(石癡), 공조판서 운유(運維)의 아들. 1774년(영조50)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문인으로서의 도와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며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에 치중하였으며 단순한 유자가 아니었다. 홍대용(洪大容), 이서구(李書九),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하였으며 기중기, 도르래, 맷돌, 수차 같은 기계들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까지 했다. 집 방안에는 천문기구가 가득 차있고 서양천문학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지도제작에도 뛰어나 당시 가장 우수한 지도인 「여지도」를 만들었고 서화에도 뛰어나 정약용이 공의 용그림을 극찬한 글이 있으나 전하는 그림이 없어서 안타깝다. 또 벼루를 잘 새겨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정초(鄭初 일명 礎). 조선 태종 때 전라도 도진무사(全羅道都鎭撫使) 겸 도절제사(都節制使)를 거쳐 진서 대장군(鎭西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정충경(鄭忠敬) ?~1443 정도공 역(易)의 맏아들이며 영양위 종(悰)의 아버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출생연대 성장과정 및 초기관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1438년 동부승지, 1440년 우부승지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그 이듬해 한성부윤에 임명되어 중국에 사신 갔다 오고 1443년 전라도 관찰사 중추원부사로 재임하던 중 별세.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정충석(鄭忠碩) 1406~1473 자는 효부(孝夫). 정도공 역(易)의 둘째아들 음직에 의하여 1424년 수의부위좌군 부사정에 임명된 이후 1438년 사헌부 감찰, 1445년 한성부 판관, 1451년 한성부 소윤, 1457년 판군자감사를 역임하였다. 146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고 1466년(세조12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事)에 올랐다. 배위는 문충공 정몽주(鄭夢周)의 손녀이다.

 

정취선(鄭取善) 1762 - 1814. 자는 덕여(德汝)이고 삼춘당 술조의 손자이다. 1793년 유생에게 보인 전강에서 1등 하여 전시에 직부되어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을 역임하였다.

 

정침(鄭忱)1424(세종 6)~1485(성종 16).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불기(不欺), 호는 정안재(靜安齋).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충석(忠碩)이며, 어머니는 정종성(鄭宗誠)의 딸이자 정몽주의 손녀이다.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1455년 감찰이 되었으며 1475년(성종 6) 행사직(行司直)이 되었고, 이해 음률(音律)에 조예가 깊어 장악원에 배속되었다. 1478년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그 뒤 직제학을 거쳐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정필(鄭弼) 1483~1542 참봉 윤경의 아들 자세한 경력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중종때 가선대부 찬성사가 되었는데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직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함이 없었으며 간언이 곧아 숨김이 없었고 지론이 공정하여 사가 없었으며 집법이 정대하여 흔들림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옛날에 어진 보필이 있었는데 경의 이름이 과연 헛되이 얻어지지 않았다”(공의 휘가 필(弼)이므로 이를 말한 것임)라고 하면서 큰물에 다니는 배와 가문 날에 내린 비에 비유하였다.

 

정필녕(鄭必寧) 1677~1753 자는 시경(諡卿) 호는 순암(順庵). 장령 적(樍)의 손자. 1714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717년 중시를 거쳐 통정대부로 승급하였으며, 1749년 가선대부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정필조(鄭弼祚) 1739 - 1813. 자는 인숙(仁淑)이고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종부시 주부, 사직령, 사헌부 지평,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1794년 사헌부 장령 1795년 유배되었다.

 

정호학(鄭好學) 1560~ 1642 자는 민이(敏而) 호는 봉헌(蓬軒) 주부 연(淵)의 아들. 1591년 이선(里選)에 의하여 현릉(顯陵) 참봉이 되고 정릉(靖陵)에 제수되었다가 경기전(慶基殿)으로 옮겼다. 1594년에 부모상을 만나고 1609년에 다시 후릉(厚陵) 참봉이 되었다가 군자감 부봉사 상서원 부직장으로 옮겼다가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議)로 승진되고 사복시 주부로 옮겼다. 1617년 용안현감으로 나갔다가 대흥현으로 바뀌었는데 광해군 때에 물러났다가 인조반정 뒤에 바로 연기현에 제수되었다. 1625년 세자책봉에 따라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가 되었다가 이듬해 익위(翊衛)로 승진하고 1627년에 정선군수가 되었는데 1629년에 체귀(遞歸)되었다.

 

정홍도(鄭弘道) 군수 수경(守慶)의 아들 조선 전기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정홍석(鄭鴻錫) 1869~1918 자는 윤조(允祚) 희원(喜元)의 아들 생부는 환교(煥敎)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 당시 비서감랑으로 있으면서 한일협상조약을 맺은 대신들에 대하여 비서감 랑(秘書監郞) 정홍석(鄭鴻錫)이 상소하였는데 그 요지는 이러하였다. “옛날 백비가 오(吳) 나라를 팔아먹고 진회(秦檜)가 송(宋)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몇 년 동안이나 머뭇거렸고 많은 시간에 걸쳐 짜고 들었습니다. 지금 하루저녁에 ‘가(可)'자 한 자를 써서 무거운 한 나라를 떠넘겨준 이런 간사한 역적으로 말하면 백비를 능가하고 진회를 뛰어넘은 자들이니 빨리 여러 역적들의 죄를 다스림으로써 나라의 법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비답을 내리기를, “이미 경이 올린 상소에 대해 비답을 내린 바 있다.”라고 하였다.

 

정효준(鄭孝俊) 1577(선조 10)~1665(현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우(孝于), 호는 낙만(樂晩). 돈녕부판관 흠(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명이 높았고, 특히 변려문(辯儷文)에 뛰어났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다가 1618년 늦게서야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대두되었을 때, 어몽렴(魚夢濂)ㆍ정택뢰(鄭澤雷) 등과 함께 극력 항소하여 이이첨 등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유배당하였으나 공은 북관에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에 서용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ㆍ전생서 봉사(典牲暑奉事)ㆍ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 등을 거쳐 1652년(효종 3) 돈녕부 도정에 올랐다. 1656년 80세의 나이로 해풍군(海豊君)에 습봉되고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그 뒤 아들 다섯이 모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관계로 김수항(金壽恒)의 주청에 의하여 1663년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제순(齊順)이다.

 

정휘주(鄭徽周) 1650~1692 자는 미숙(美叔) 욱(勖)의 아들 1687년 문과에 급제 주서(注書)를 역임하였다.

 

정흔(鄭忻)동지 충석(忠碩)의 아들 1456년(세조2) 문과에 급제하고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정흠(鄭欽) 1557~1635 초명은 득몽(得夢), 자(字)는 흠재(欽哉), 호(號)는 송천(松泉). 대흥 현감(大興縣監)ㆍ양천 현령(陽川縣令)을 거쳐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지냈으며 해성군(海城君)에 봉하여졌다.

 

정흥경(鄭興慶) 1451~1525 자는 길보(吉甫) 참의 침(忱)의 아들 1469년 음보로 전력부위가 되고 1485년에 사용부사정(司勇副司正)에 임명되었고 1498년에 북부참봉이 되고 1501년에 전옥 서로 옮겼으며 1504년에 풍저창봉사(豊儲倉奉事)로 전임하고 1504년에는 사온서(司醞署)로 옮기고 1507년에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그 복을 마친 후 1512년에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에 서용되었다. 1513년에 사도시 주부로 승격하고 1514년에는 연산현감으로 나아가 그 임기가 끝난 후 선공감 판관이 되고 얼마 후 사온서령으로 옮겼다. 1520년에 한성부 판관이 되고1521년에 사품계에 올라 사재감 사도시(司寺)의 첨정을 역임하고 그해겨울에 청도군수로 나갔다. 부임한지 5년 만에 연로로 물러났는데 읍인들이 유임을 호소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부임할 것을 특명하여 백성들의 여망을 따르려 하였으나 떠나기 전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정희량(鄭希良) 1469(예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철원부사 연경(延慶)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1492년 성종이 죽자 궁중에서 불사를 크게 일으키려고 하여 태학생(太學生)ㆍ유생(儒生)들과 더불어 불사의 부당함을 직간하였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 중 지나친 것이 있다하여 이듬해 해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의 정자 검열을 거쳤다. 이듬해 김전(金詮)ㆍ신용개(申用漑)ㆍ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될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1497년 예문관대교에 보직되어 ①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經筵)에 근면할 것, ②간언을 받아들일 것, ③현사(賢邪)를 분별할 것, ④대신을 경대(敬待)하며, 환관을 억제할 것, ⑤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칠 것, ⑥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제할 것 등의 소를 올린 바 있다. 다음해 선무랑ㆍ행예문관봉교로서《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에는 사초문제(史草問題)로 윤필상(尹弼商)등에 의하여 신용개ㆍ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는데,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杖) 100, 유(流) 3,000리의 처벌을 받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에 다시 김해로 옮겨졌다. 유배지에서 조위(曺偉)와 시로 서로 화답하였다. 그해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수분(守墳) 하다가,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고 은둔하였다. 총민박학(聰敏博學)하고 문예에 조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았으며, 영달에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정희성(鄭希聖) 1599-1648, 자는 대진(大進), 호는 자노당(自老堂), 선무랑 문형(文亨)의 아들. 미수 허목(許穆)과 함께 정언옹(鄭彦雨言)에게 글을 배우고 광해군때 재주와 학문을 숨기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나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정희조(鄭熙祚) 1777 - ?. 자는 경효(敬白臯)이고 1806년 강경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직부전시를 치러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가주서, 승문원 박사, 예조좌랑, 자여찰방,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였다.

 

정희언(鄭希彦) 대장군 초(初)의 손자 조선 초기에 영동정(令同正)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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