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때 정문부[鄭文孚, 호 : 농포(農圃), 시호 : 충의(忠毅)] 선조를 의병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1708년에 세운 높이 187cm, 넓이 66cm, 두께 13cm의 전승기념비로서 우리 민족의 혼과 역사가 담긴 문화재이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이 비를 동경 야스쿠니 신사로 가져가서 100년간 방치해 두었던 것을 종중과 함께 남과 북의 반환노력 끝에 2005년 10월 20일 환국하였으며 2006년 3월 1일 다시 북한으로 북송되어 함경도 길주 (현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 원 소재지에 복원 되었다. 북관대첩비가 북송되자 문화재청에서는 2006년 경복궁 고궁 박물관 앞뜰과 천안 독립기념관에 복제비를 건립하였고, 2007년 6월에는 충의공 묘소가 있는 경기도 의정부 송산에 제3의 복제비를 설치하고, 10월 25일 북관대첩비 복제비 제막고유제 행사를 거행하였다.

위의 사진은 2005년 11월 17일 국립고궁박물관 북관대첩비 맞이 국중대회에서의 '학연화대 빗돌맞이' 장면이다.


유명 조선국 함경도 임명대첩비문과 비명
북관대첩비 전문(번역)

곤륜 최창대 지음
이봉화 명필 글씨를 씀
노산 이은상 번역함

옛날 임진란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일세를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충무(이순신)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권원수(권율)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월천(李月川, 이정암)의 연안(延安)대첩이 있어,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 말과 부역과 군졸들을 낼 수 있음에 힘입은 것이다.

고단하고 미약한데서 일어나 도망하여 숨은 무리들을 분발시켜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여 마침내 오합지졸을 써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 쪽을 수복함과 같은 이는 관북(함경도)의 군사가 제일인 것이다.

처음 만력(萬曆) 중에 왜의 추장 수길(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강한 군사들을 믿고 거만하게 중국을 침범하고자 엿보다가 우리가 길을 빌려 주지 않음을 성내어, 드디어 크게 쳐들어와 서울에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이미 서쪽으로 거둥하였고, 모든 고을이 무너졌으며, 적은 이미 경기도를 함락시키고 그 무서운 장수 두 사람이 군사를 두 길로 나누니 행장(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은 행조(行朝,왕)를 뒤밟아 서쪽으로 가고 청정(淸正,가토 기요마사)은 북방 침공하는 것을 맡았었다.

그해 가을에 청정이 북도로 들어갔는데 적의 정예한 군대가 매우 거세었기 때문에 철령(鐵嶺,강원도 고산군과 회령군의 경계,685m) 이북은 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때에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역하여 적에게 내응하였다. 경인은 회령부의 아전으로 본성이 악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적이 부령(富寧)에 이르자 그 위기를 타고 난을 일으켜 피난해 온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와 대신을 잡고 그리고 장수와 관리들을 묶어 적에게 주고 정성을 보였으며, 경성(鏡城) 아전 국세필(鞠世弼)은 그의 숙부요, 명천(明川) 사람 말수(末秀), 목남(木男)과 서로 무리를 지어 모두 어울려 적이 주는 관작을 받아 각각 고을을 점거하고 성세를 벌여 죽이고 위협하기를 그의 지령대로 하니,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겁내어 인민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했었다.

경성(鏡城) 이붕수(李鵬壽)는 의기 있는 선비라 분개하며 말하되 ‘비록 국가의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나 흉도가 감히 저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최배천(崔配天) · 지달원(池達源) · 강문우(姜文佑) 등과 함께 의병 일으키기를 꾀했는데 여러 사람의 지위가 서로 비슷하여 장수 삼을 이가 마땅치 않았다.

평사 정문부는 문무의 재주는 있으나 군사가 없어 싸울 수 없으므로 몸을 빼어 산골에 숨어 있던 중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즐거이 좇았던 바, 마침내 정공을 추대하여 주장을 삼고 종성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경원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을 차장으로 삼고 피로써 맹서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백여명을 얻었다.

그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북쪽 변방을 침범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사람을 시켜 세필을 달래어 같이 힘을 합하여 오랑캐들을 막자 하니 세필이 허락하고 의병들을 성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튿날 아침 정공이 기와 북을 세우고, 남문으로 올라오도록 꾀어 그가 현실(요배,망배)할 때에 문우(文佑)가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그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놓아주었다.

그리고 곧 군사를 이끌고 명천(明川)으로 가서 말수(末秀) 등을 잡아 목 베고 회령 사람이 또한 경인을 쳐서 목 베어 의병에게 호응하니 군세가 점점 커지고 따라와 붙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며, 길주 사람 허진(許珍) · 김국신(金國信) · 허대성(許大成)이 또한 군사를 모아 성원하였다.

이때에 청정(淸正)이 편장(偏將)으로 하여금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주에 웅거케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관(南關)에 진을 쳐 호응하고 있었다.

11월에 적을 가파리(加坡里)에서 만나 싸우려는데 정공은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되 현룡은 중위장(中衛將)을 삼아 백탑(白塔)에 진을 치고, 오응태 · 원충서는 복병장을 삼아 석성(石城)과 모회(毛會)로 나누어 진을 치고, 한인제(韓仁濟)는 좌위장을 삼아 목책(木柵)에 진을 치고, 유경천은 우위장(右衛將)을 삼아 날하(涅河)에 진을 치고, 김국신 · 허진은 좌우 척후장을 삼아 임명과 방치(方峙)로 나누어 진을 치게 했는데 적들은 여러 번 이긴 끝이라 방비를 허술하게 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함께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여 기운을 얻어 밀고 나갔는데 고함치며 앞서 나가지 않는 군사가 없으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는데, 군사를 풀어 추격하여 그 장수 5명을 죽이고 목을 수없이 베었으며, 그 말과 무기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래서 원근이 진동하여 장수 관리들로 도망치고 숨어 엎디었던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호응하니, 무리들이 7천명에 이르렀으며, 적은 마침내 길주성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감히 발동하지 못했는데 길옆에 복병을 두어 나오기만 하면 무찔러 버렸다.

이윽고 성진의 적이 임명(臨溟)을 크게 침략하므로 정예한 기병들을 이끌고 습격했으며, 산에 기대어 복병했다가 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협공하여 크게 깨뜨리고 또 수백 명을 목 베고 마침내 그 배를 갈라 창자를 행길가에 늘어놓자 군사의 형세가 크게 떨치고 적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12월에 또 쌍포(雙浦)에서 싸웠는데 싸움이 한창 어울리자 편장(偏將)이 철기(鐵騎)를 끌고 가로 찌르기를 풍우같이 빨리 하니 적이 세력을 잃어 맞서 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므로 이긴 기세를 타고 또 깨뜨렸다.

이듬해 정월에 단천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돌아와, 길주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자, 청정이 불리함을 알고 큰 군대를 보내어 길주의 적을 맞아 돌아오게 하므로 우리 군사들은 그 뒤를 쳐서 백탑에 이르러 크게 싸워 또 깨뜨렸으며, 이 전쟁에서 이붕수(李鵬壽) · 허대성(許大成) · 이희당(李希唐)은 전사했으나, 적은 마침내 물러가 다시는 감히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이때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도 또한 행장(行長)을 평양에서 깨뜨렸는데, 정공이 최배천을 시켜 샛길로 행재(行在:임금이 임시 머무는 곳, 행궁)에 승첩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보고 눈물을 흘리며, 붕수에게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증직(贈職)하고, 배천에게는 조산대부(朝散大夫)의 계급을 내렸다.

그때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문부가 절도사에게 아뢰지 않았음을 성내며 의병의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임금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기 때문에 공에게는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오랜 뒤 현종(顯宗) 때에 관찰사 민정중(閔鼎重)과 북평사 이단하(李端夏)가 부로(父老)들에게서 듣고 사실을 아뢰어 비로소 문부에게는 찬성(贊成), 붕수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하고 남은 사람들에게도 차등 있게 관작을 내렸으며, 또 사당을 경성 어랑리(漁郞里)에 세워 당시 같이 일한 여러 사람들을 제사케 하고 창렬(彰烈)이라 사액했다.

지금 임금 경진년(庚辰年)에 창대(昌大)가 북평사가 되어 의병의 자손들과 함께 연고지를 방문하여, 사적을 자세히 얻어 개연히 제공의 기풍을 상상도 하고 또 이른바 임명(臨溟) · 쌍포(雙浦)를 찾아 진치고 싸우던 자리를 거닐고 돌아보며 탄식하면서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부로에게 말하되 ‘섬 오랑캐의 전화가 몹시 심하여 세 서울이 함락되고 팔도가 무너졌는데, 이 분들은 죽음을 걸고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서 억센 도적을 무찔러 우리나라의 발상한 옛 땅으로 하여금 마침내 오랑캐 땅이 되는 것을 면하게 했으며, 변방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충의를 서로 권하게 된 것이 그 또한 누구의 힘이더냐?

행주 · 연안에는 모두 비갈(碑碣)이 있어 사적을 적어 공렬을 나타내었으므로 동서로 오가는 이들이 우러러보고 몸을 굽히거니와 관북의 거룩한 공로를 가지고도 비갈 하나가 없으니 어찌 제군의 수치가 아니겠는가?’하니 모두 대답하되 ‘그렇소. 그것은 우리들의 뜻이기도 한데 하물며 공의 명령까지 있음이겠소.’하며 마침내 돌을 다듬고 재물을 모으고 사람을 시켜 글을 청하건마는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사양했더니 다시 와서 말하되 ‘이 일은 공이 실로 발의한 사람이니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일을 철폐하겠소.’하므로, 나는 마침내 그의 사적을 서술하고 새긴다.


남쪽에서 도적이 와 명나라를 치려드니
우리는 이웃이 되어 온 나라가 화 입었네.

높고 높다 북방이여 오랭캐 소굴 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저항없이 따르도다.

피 머금은 입으로 흉한 독을 뿜을 적에
씩씩하다 우리 군사 뭇호걸 헌걸차다.

군사란 정의가 제일, 창과 활이 부질없이
반역자 무찌르니 저 도적 못 덤비네.

병정들 북을 치니 산이 무너지듯 바다가 꿇듯
우리 군사 빛난 전술 흉한 적을 무너지네.

천벌을 내리게 함 사사 아닌 충성 때문이거니
북쪽 땅 평정되어 누에치고 농사짓네.

임금은 감탄하며 누가 그대의 공보다 더 하겠느냐?
벼슬주고 사액하고 한결같은 은혜로다.

선비기풍 열렬하니 백성들도 용감하고
임명 바닷가에 우뚝한 돌이 있어
찬송을 거기 새겨 영원토록 보이노라.

숭정 갑신 뒤 65년 10월 일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