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정종(鄭悰 寧陽尉)와 경혜공주
* 증 보조공신(補祚功臣) 영의정 영양부원군, 영양위 정공 행장
공의 이름은 종(悰)이요, 성은 정씨요, 본관은 해주다. 먼 조상의 이름은 숙(肅)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벼슬이 전법정랑(典法正郞)에 이르렀고, 그 뒤 언(琂)이란 분이 소윤(少尹)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니 곧 공의 고조이시다.
증조의 이름은 윤규(允珪)로 낭장(郎將)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의 이름은 역(易)으로 비로소 우리 조선으로 들어와 태종과 세종 두 임금을 섬겨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과 집현전 대제학에 이르렀었다. 아버님의 이름은 충경(忠敬)으로 형조참판을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님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목사 호덕(好德)의 따님이시다.
경태(景泰) 원년(1450)에 공이 문종대왕의 부마로 경혜공주(敬惠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여 영양위(寧陽尉)에 봉해졌다. 임신년(1452)에 문종이 돌아가셨을 때 단종이 어린나이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안팎이 다 위태로워하며 염려하였다.
이듬해 단종이 향교동(鄕校洞)에 있는 공의 사제(私第)로 옮겨와 계신 일이 있었고, 대신인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이 죽게 되자 임금께서 의지하며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다만 공과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몇 사람뿐이었다.
을해년(1455)에 이르러 정승 한확(韓確)등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정종이 문종 때부터 대궐 안의 권세를 휘둘러 법에 벗어난 일이 많았으니 종묘사직을 생각하여 사사로운 정으로 나라의 법을 저버릴 수는 없는지라 청컨대 빨리 그 죄를 바로 다스리소서』했다.
이리하여 공은 광주(光州)로 귀양가고 금성대군 또한 순흥(順興)으로 귀양갔다. 이날 단종이 내관 전균(田畇)을 시켜 한확 등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내 나이 어려 안팎의 일을 모르는지라 간사한 무리들이 몰려 일을 꾸며 어지러워질 조짐이 끊이지 않으니 내 장차 임금의 자리를 영의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물려주리라』했다.
세조(世祖)가 이미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자 단종을 높여 태상왕(太上王)으로 모셨다. 병자년(1456)에 여섯 신하들이 죽자 단종은 대궐에서 영월(寧越)로 물러나게 되었고, 정축년(1457) 6월에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군대를 일으켜 상왕을 맞이하려 꾀하다가 마침 이를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는지라 금성대군은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되자 종친(宗親)과 정부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정종과 송현수(宋玹壽)와 영(瓔)어(王於) 전(瑔)의 반역죄는 나라의 법으로 반드시 다스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니 바라건데 대의(大義)로서 죄를 바르게 다스려 화의 뿌리를 끊으소서』하니 송현수는 곧 단종비 송씨의 아버지였고, 영 어 전은 다 세종의 왕자였다.
공은 마침내 9월 20일 귀양 간 곳에서 죽음을 당했고 나흘 뒤에는 상왕께서 세상을 떠났다. 슬프다 공과 같은 분이야말로 참으로 나라와 함께 기쁨과 슬픔을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단종의 심복 신하는 공을 비롯한 몇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이 이를 꺼리고 기어코 없애려 했던 것이니 앞서 정청(政廳)에서 올린 글을 대궐 안의 일을 핑계했으나 실은 공이 조정에 있는 것을 꺼린 때문이었다.
광주로 귀양 보내라는 청이 있자 잇따라 임금께서 자리를 물려준다는 말씀을 내리게 되었고, 정축년에 여량부원군(驪良府院君)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단종임금 돌아가실 때 목숨을 잃었으니. 이로써 임금에게 충절을 다하여 목숨을 버려도 변치 않았던 공의 의로움을 볼 수 있다.
세상에서 단종이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을 때의 일을 논하는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단종을 도와 처음 정치를 한 사람은 황보인과 김종서였고, 단종을 위해 충절을 다하다가 죽은 사람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이었으며, 단종을 섬겨 일생을 함께한 것은 금성대군과 영양위였으니 그들이 걸은 길은 비록 다르나 단종을 위해 죽은 일은 똑같다』고 했다.
공이 광주로 귀양갔을 때 公主도 함께 따라 갔었다. 갖은 위험과 욕된 일을 두루 맛보면서도 원망하고 걱정하는 빛이 없이 아내의 도리를 지켜 게을리함이 없었다. 뒤에 공이 죽자 슬퍼하며 예를 지키니 이를 보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사년(1461)에 세조가 불러 돌아오게 하여 일품록(一品祿)을 주도록 명하고 그로서 평생을 마치게 하니 공보다 17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는데 딸은 일찍 죽고 아들은 공이 귀양살이 할 때 태어났다. 일곱 살에 공주를 따라 대궐로 들어오니 세조가 보시고 불쌍히 여겨 앞으로 불러 무릎에 앉히고 크게 한숨을 지으며 눈물을 흘린 다음 미수(眉壽)라는 이름을 내리고 성종(成宗)이 아직 군(君)으로 있을 때 이를 모시게 했다.
자란 뒤에 안팎의 벼슬을 두루 거친 뒤 우찬성에 올랐고, 중종(中宗)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지자, 공을 순충적덕(順忠積德) 보조공신(補祚功臣) 영의정 영양부원군에 추증했다.
처음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께서 사저에 계실 때 임금께 말하기를 『문종임금의 혈손으로는 정미수 밖에 없으니 바라건대 그로서 시양자(侍養子)로 삼겠다』고 했으므로 그 뒤로 공의 자손이 대대로 단종임금 내외분의 능 제사를 받들어 왔다.
숙종 무인(1698)년에 단종의 위호(位號)가 추복(追復)되었을 당시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이 또 다 벼슬과 지위를 되찾는 은전(恩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먼저 아들 해평부원군으로 인한 추증이 있었으므로 여기에 끼이지 않았다.
해평부원군의 뒤를 이은 양자 승휴(承休)는 도사(都事)를 지내고, 증손 원희(元禧)는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현손 흠(欽)은 판관(判官)을 지냈고, 용(鎔)과 감(鑑)은 정랑(正郞)을 지냈다. 판관의 아들 효준(孝俊)은 나이 여든이 넘도록 살았고 벼슬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해풍군(海豊君)의 군호를 받았다.
해풍군의 아들 다섯과 손자 하나가 잇달아 문과에 올라 함께 벼슬이 대신의 지위에 이르니 온 세상이 부러워하여 칭송했다. 지금 8, 9대에 이르는 동안 안팎의 자손들이 너무도 많은지라 다 기록하지 못한다.
지금 임금(英祖)이 즉위한지 34돌 되는 무인(1758)년에 마침 경연(經筵)에 나온 신하가 나라일로서 아는 사람이 있는지라 성상이 특히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시니 마치 기다림이 있는 것 같아 그것이 또한 우연이 아니었다.
슬프다 공이 세상을 뜬지 벌써 삼 백년이 되는지라 세대가 이미 멀어지고 문헌이 상고할 길이 없어 공의 살았을 당시의 아름다운 말씀과 행실이며 확실한 발자취를 자세히 알 길이 없고 다만 공의 시대와 공의 죽음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아! 공의 시대로서 공의 죽음이 있었으니 이로서 공의 일생이 어떠했던가를 대강 알 수 있을 것이다. 삼가 공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가보에 실린 일들을 간추리고 위와 같이 약간 그 차례를 바로잡아 뒤에 일보는 사람들의 참고에 이바지 하고져 한다.
외후손(外後孫)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임순(任珣) 삼가 간추림.
* 경혜공주(敬惠公主) 묘지명
공주는 문종대왕의 따님으로 어머님 권씨(權氏)는 문종이 즉위하신 뒤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책(追冊)되었다. 안동의 대성(大姓)인 고려의 태사(太師) 행(幸)의 후손인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권전(權專)이 태부(太傅)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12대손인 부정(副正) 최용(崔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태종 18년(1418)에 왕후를 낳으니 세종 13년(1431)에 세자빈으로 뽑히어 동궁(東宮)으로 들어와 문종을 모시었다.
세종 17년(1435)에 공주를 낳아 세종 32년(1450)에 정종(鄭悰)에게 시집갔다. 종(悰)은 영의정에 추증된 정도공(貞度公) 역(易)의 손자요, 형조참판 충경(忠敬)의 아들이다.
단종 3년(1455)에 종(悰)이 광주로 귀양가자 공주도 함께 따라가 보통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갖은 곤욕을 두루 겪으면서도 조금도 원망하는 빛이 없이 아침저녁으로 아내의 도리를 다하여 조금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종(悰)이 마침내 죽게 되자 공주는 슬퍼하며 예절을 다하고 어린 아들을 어루만져 기르니, 사람들이 공주의 팔자 기박함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그 아내로서의 도리를 장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세조 8년(1461)에 세조가 내관을 보내 서울로 불러 돌아오게 한 다음 특별히 노비 50명을 내리고 일품록을 주어 평생을 마치게 했고, 세조 11년(1465)에는 집을 한 구(區)를 내렸으며, 예종(睿宗) 원년(1469)에는 예종이 또 노비 50명을 내리고, 대왕대비가 더욱 보살피며 사랑하여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 혹 여러 날 묵는 일도 있었다.
성종(成宗) 4년(1473) 섣달에 병을 얻으니 임금께서 내의(內醫)를 보내고 아울러 약을 내려 치료케 했으나 효력을 보지 못하고 28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치시니 그 때 나이 39세이었다.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임금께서 관원을 보내 조상과 제사를 드리게 하고 관에서 장례일을 맡게 하여 이듬해인 성종 5년(1474) 3월 29일 고양(高陽) 망산(望山) 동향(酉坐)터에 산소를 모셨다. 공주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으니 아들은 이름이 미수(眉壽)로 지금 돈령부 참봉으로 있고 딸은 아직 어리다.
새겨 말하노니 사람이 태어나면 잘되고 못되며 오래살고 일찍 죽는 것이 그 사이에 명이 있어 아득히 잡을 길이 없는지라 어찌 이를 기필 할 수 있으리요. 공주의 귀한 몸으로 그 복을 누리지 못하고, 거룩한 덕을 지니고도 수를 누리시지 못했음은 어째서인가. 그러나 하늘의 갚아줌은 엉성하면서도 빈틈이 없나니 남은 경사가 반드시 자손 대에 더욱 커지리라. 내 여기서 하늘의 명이 어김이 없음을 시험하게 될 줄 아노라.
성화 10년 4월 10일지
위 기록은 이승소(李承召)의 문집에 나와 있는데 뒤에 무덤을 고쳐 만들 때 이를 확인하고 다시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