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정침(鄭忱) 참의공
참의공 행장
공의 휘는 침(忱), 자는 불기(不欺), 호는 정안재(靜安齋)이다.
공의 증조 휘 윤규(允珪)는 판례의사사(判禮儀司事)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역(易)은 조선조에 와서 좌찬성·대제학으로 시호는 정도(貞度)이고, 아버지 휘 충석(忠碩)은 음보(蔭補)로 동중추(同中樞)에 이르렀으며,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은 연일 정씨(鄭氏) 이조참의 종성(宗誠)의 따님으로, 문충공(文忠公)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가 그 조부이다.
공은 갑진(1424)년 2월 9일에 태어나서 계유(1453)년에 문과에 오르고, 재학(才學)이 박통(博通)하여 임금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사헌부 감찰과 예조정랑을 역임하고, 교리(校理)에 제수되어 평양에 배왕(陪往)하여 서도(西道)의 다사(多士)를 시험할 적에는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학사(學士) 이극증(李克增)과 더불어 시사(試事)에 참여하였다.
이윽고 예문관 직제학에 승진하여 임금의 은우가 매우 융숭하였고 그 보필 또한 많았다. 이어 호조 참의에 제수되어서는 단종이 손위(遜位 : 왕위를 양보함)하고 여러 현인(賢人)이 주륙을 당하므로, 공은 시사(時事)를 통렴(痛念)하여 우상(憂傷)해하고 강개해 하였다.
이에 외숙인 설곡(雪谷) 정공보(鄭公保)를 찾아 의리(儀理)를 강론하였고, 종형인 영양위 종(寧陽尉 悰)이 후명(後命: 사약을 내리는 일)을 받아 온 가문이 화를 만났을 적에는 공도 여기에 연좌방폐(連坐放廢)되어 일생동안 자정(自靖)하였다.
을사(1485)년 2월 23일에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그 이듬해 3월 15일에 양주 송산 곤좌에 장사지냈고, 배위 화순 최씨(崔氏)는 대사성 자빈(自濱)의 따님으로, 무신(1428)년에 태어나서 정묘(1507)년에 세상을 떠났다.
소생은 3남 2녀로, 장남 유경(有慶)은 주부, 차남 연경(延慶)은 부사(府使), 삼남 흥경(興慶)은 군수이고, 2녀는 현감 이덕근(李德根), 부정(副正) 권돈(權敦)에게 시집갔으며, 손자와 증손 이하는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