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정미수(鄭眉壽) 해평부원군

 정미수(鄭眉壽)공께서 단종 임금 내외분의 제사를 받든 일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은 문종 임금의 사위다. 단종이 임금의 자리를 세조에게 물려주었을 때 영양위는 금성대군(錦城大君) 등 여러 종친과 여러 충신들이 함께 화를 입으니 단종이 돌아가신 나흘 전이었다.
마침내 처자들이 죄를 따라 입고 가산을 몰수당하니 부인인 공주께서는 순천부(順天府)의 관비(官婢)가 되었었는데 이때 공주는 임신 중이었다. 세조가 내시(內侍)를 보내며 이르기를『공주가 낳은 아이가 계집아이면 데리고 오고 만일 사내아이면 목 졸라 죽게 하라』고 했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貞喜王后)가 그 내시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이르기를 『문종 임금의 핏줄이라고는 공주가 낳은 아기뿐이다.
지금 만일 법에 따라 목 졸라 죽인다면 문종의 핏줄은 영영 끊어지고 만다. 공주가 낳은 아기가 비록 사내아이 일지라도 데리고 오도록 해라. 임금을 속인 죄는 내가 직접 당할 것이다.』라고 했다.
내시가 왕후 시킨대로 아기를 데리고 오자 여자의 옷을 입혀 궁중에서 길렀다. 어느 날 세조가 내전으로 들어와 보고 묻기를 『저 아이의 생김새와 기상이 흡사 사내아이 같으니 참으로 이상 하구려』했다.
왕후는 사실대로 바로 고했다. 세조가 아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말하기를 『지나간 일을 말해 무엇 하겠소. 이제 이 아이를 보니 절로 눈물이 쏟아지는구려』하고 이름을 미수(眉壽)라 부르게 하니 오래 살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그날로 공주의 죄를 용서하여 궁중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대궐 밖에 집을 지어 살게 하고 두 모자를 날마다 내전으로 문안들 게 했다. 미수공(海平府院君)께서는 스스로 화를 입은 집안의 살아남은 몸이라 하여 감히 과거(科擧)를 보지 못했으나 잇달은 임금의 특명으로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이 때 단종임금 부인께서 연미정(燕尾亭)으로 나가 살며 스스로 정업원(淨業院) 주지(住持)라 불렀는데 성종에게 말하여 공을 시양자(侍養子)로 해줄 것을 청했다.
임금이 특별히 이를 허락하자 공은 잠시도 그 앞을 떠나지 않으며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과 받들어 모시는 일이 친자식과 다름이 없었고 평소에 늘 어머님이라 부르고 스스로를 자식이라 일컬었다.
부인께서 82살까지 편안히 사시다 돌아가니 온 세상이 공의 효성스런 봉양을 칭찬했다. 부인께서 돌아가신 뒤 공의 아들 도사공(都事公) 승휴(承休)께서 아버님 대신 3년 상을 입고 양주(楊州)에 있는 선산 기슭에 장례를 모시니 곧 지금의 사능(思陵)이다. 그 뒤로 자손이 대대로 단종의 사당 신주 옆에 제사 받드는 제주(祭主)로서 이름을 적었고 그 대수(代數)에 따라 고쳐 썼다.
자손 가운데 바깥 벼슬로 부임 할 때는 행차 옆에 반드시 단종의 사당을 모시고 갔는데 이렇게 한 것이 모두 7대나 되었다. 자손이 대대로 정성껏 받들며 돌아가신 날과 명절 때가 되면 새벽 일찍 목욕하고 손수 방과 대청을 쓸고 닦으며 음식 만드는 일과 상차리는 일들을 하녀와 하인들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제사지내는 날 새벽에는 늘 이상하고 기이한 일들이 많았는데 하루는 현령공(縣令公) 흠(欽)의 꿈에 빛나는 구름이 대청에 가득 차며 붉은 기를 앞세우고 젊은 임금이 나타나 말하기를 『너의 집이 4대로 제사를 정성껏 받들었는데도 그 은혜를 갚지 못한지라 구슬 다섯 개를 준다. 잘 심어 가꾸고 기르라』했다.
공이 묻기를 『이 구슬이 무슨 구슬입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계수나무 열매니라』했다. 공이 받아 품속에 넣고 문득 깨니 방안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 뒤 지돈령공(知敦寧公) 효준(孝俊)때에 이르고 다섯 아들이 다 문과에 급제하니 과연 옛날 꿈이 맞은 것이었다.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이 복위 되신 뒤, 특히 명령하여 사능 능위 몇 걸음 안에 있는 5대에 걸친 열 한 무덤을 옮기지 말도록 하고 또 산 위에서 제사지내도록 허락하니 대개 자손들의 배장(陪葬)한 예에 따른 것이다.
능으로 복위된 처음에 숙종이 경연(經筵)에 오른 대신들에게 묻기를 『정씨 집의 장릉(莊陵 : 端宗)과 사릉 두 능에 대한 충렬(忠烈)은 육신(六臣)과 다른 것이 없고 살아계실 때의 봉양과 제사를 받드는 일은 옛 역사에도 드문 일이니 능을 지키는 재랑(齋郞) 벼슬은 정씨 집에서 대대로 뽑아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소?』하니 여러 대신들이 다 임금의 말씀이 지당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승 남구만(南九萬)이 홀로 아뢰어 말하기를 『재랑 벼슬이 곧 나라의 소임입니다. 어떻게 수많은 정씨집 사람들이 누구나 할 수 있겠습니까? 재랑을 뽑는 법은 반드시 생원과 진사인 사람 중에서 뽑는 것이니 정씨 집에 만일 생원 진사인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뽑아 쓰도록 하는 것이 법도에 맞을 것입니다.』했다.
이로부터 4대에 걸쳐 양쪽 능의 재랑을 지낸 사람이 13명이나 되었다. 영조 12년 (1736)에 이르러 임금이 사릉으로 행차했을 때 영양위의 자손들 중에서 생원 진사인 사람을 찾았으나 마침 해당되는 사람이 없는지라 유학(幼學 : 벼슬하지 않은 선비) 운희(運熙)가 특별한 은전으로 재랑이 되었다.
영조 47년(1771년)에 연미정에 집을 짓고 비를 세운 다음 이어 찬성공(贊成公)에게 제사를 지내고 친히 제문을 지으니 그 글에 말하기를 『슬프다 그대여 해주의 훌륭한 집안이었도다. 문종의 외손자로 이름이 족보에 올라 있네. 나라를 편히 한 공신으로 몸은 훈공(勳功)과 귀척(貴戚)을 겸했도다.
착한 일이 복이 되어 자손이 잇달아 과거에 올랐네. 내 늦게 옛 일을 생각하여 연미정에 집을 짓고 비를 세워 이 자리에 흐느껴 우노라. 여량부원군(礖良府院君 : 端宗妃의 아버지)의 후손을 볼 수 없는지라 특히 그대의 자손에게 부탁하노니 내 마음 누를 길 없도다. 슬프다 제사를 받드는 일은 부모의 3년 상을 마친 사람에게 맡기게 하노라. 본 고을에서 음식을 차리고 그 글을 내가 직접 지었으니 그대의 혼령이 있거들랑 부디 이 잔을 받으시라』했다.

정조 15년(1791)에 임금께서 사릉에 행차했을 때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각 마을에 두루 알리어 영양위의 자손들은 벼슬한 사람이든 벼슬하지 않은 선비든 다 함께 능 안에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라』고 했고, 또 명령하여 말하기를 『영조임금께서 능을 참배하신 지 지금 60년이 가까웠는데 내 또 참배를 하게 되니 선대에서 행하신 옛 일을 내 또한 따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찬성의 제사는 마땅히 그 망제소(望祭所)에서 지내려니와 그 제사는 자연 사사로운 제사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또 영양위가 이미 장릉(莊陵)에 배향되어 있으니 찬성 또한 본 능에 배향한들 어떻겠는가? 승지를 찬성 무덤으로 보내 능 제사와 같이 제사를 지내되 장릉의 배향하는 은례(恩例)에 따르도록 하라』고 했다.
또 명령하여 이르기를 『이제 이미 찬성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으니 영양위와 공주의 무덤에도 같이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양위의 무덤은 알 길이 없고 다만 공주의 무덤만 이 고양(高陽) 땅에 있다고 하니 또한 대궐로 돌아간 뒤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했다. 이 날 여러 자손들이 능 밖에서 행차를 맞이하니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영양위의 자손으로 여기 모인 사람이 몇이냐? 다 들어와 참석케 하라』고 했다.
모든 자손들이 명령에 따라 참석하니 또 명령하여 말하기를 『찬성 무덤의 제문은 반드시 높은 목소리로 크게 읽어 전각(殿閣)에서 축문 읽는 소리와 같게 하라』고 했다. 제문은 임금께서 친히 지으니 그 글에 말하기를 문종의 핏줄이요, 단종의 생질이로다.
살아계실 때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 제사 받드는 왕비께서 그대로 인해 편안하셨네. 위패를 종묘(宗廟)에 모시지 못하고 무덤은 생질에게 의지했도다. 이미 능으로 모시고도 그대로 두었음은 대개 배장(配葬)의 뜻을 따름이로다.
목숨을 걸고 길이 호위하여 잠시도 멀리 함이 없음이로다. 세월이 옛 사당에 깊어가니 은택이 오랜 기록에 남아 있도다. 착한 아버지는 장릉에 배향되고 뒤를 이은 자손들은 나라의 녹을 받는 도다. 내 그대에게 사사로운 정을 둠이 아니라 애오라지 옛 일에 보답함이로다.
사당 위패 옆에 함께 잔을 드리노라』했다.
임금께서 제사를 마치고 안향청(安香廳)에 나와 앉아 영양위의 모든 자손들을 들어오게 하고 각각 벼슬과 이름을 물은 다음 가장 나이 많고 항렬이 높은 사람에게 재랑 벼슬을 내리니 곧 유학 운기(運耆)였다. 곧 홍전문(紅箭門)으로 가서 절하고 먼저 사당에 뵈온 다음 임금의 은혜에 감사케 했다.
임금이 이어 옛 일을 생각하여 시 한 수를 지으니 시에 말하기를 『행차의 깃발이 펄럭이며 새벽기운도 차가운데, 신비로운 비는 십리 여울을 새로이 적시누나. 소자(小子 : 임금이 자신을 말함) 감히 그 날 일을 말하노니 하늘은 진즉 길이 편안한 땅을 마련해 주셨네. 동녘산 새벽달에 연미원(燕尾院)을 바라보고, 소쩍새 우는 봄날이면 영월(寧越)의 능을 생각하네. 두 곳 신선의 땅이 멀지 않음을 알거니, 다시 단풍과 잣나무에 이슬이 크게 맺힘을 보게 되리라』했다.
영양위의 모든 자손들을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승지를 시켜 읽어 들리게 하고 명령하여 말하기를『내 이 곳을 보고 옛날 일에 대한 감회를 누를 길이 없거든 하물며 그대 정씨집 자손들로 어찌 슬픈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모든 자손들 중에 만일 내 시와 화답하여 지어 올릴 사람이 있으면 지어 올리도록 하는 것이 좋으리라』했다.
이 해 봄에 특히 명하여 장릉 정자각(丁字閣) 남쪽에 단을 쌓게 하고 충신단(忠臣壇)이라 이름하여 단종을 위해 목숨 바친 여러 신하들을 배향하게 하니 여섯 번째 위패가 곧 영양위다. 이로 인해 장릉의 제관(祭官)은 영양위의 자손을 뽑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영양위 자손 중에 생원 진사한 사람은 항상 양쪽 능의 재랑이 되었는데 이렇게 하기를 세 임금시대를 계속했다.

숭정 네 번째 신미(순조11년, 서기1811년) 3월 후손 동몽교관(童蒙敎官) 광연(光淵)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