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정변(鄭忭) 생원공
 
 생원공 묘갈명
공의 성은 정(鄭)이요, 휘는 변(忭)이며, 본관은 해주다. 아버지의 휘는 충석(忠碩)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한성부소윤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 공주목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등을 지내셨고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이조참의 종성(宗誠)의 따님이자 고려충신 포은 정몽주선생(圃隱鄭夢周先生)의 손녀이고 보문각직제학 박중용(朴仲容)의 외손녀이시다.
6남3녀 중 4남으로 태어나신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총명과 후덕(厚德)이 남달리 탁월했을 뿐더러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셨다. 세분의 형들이 등제현관(登第顯官)한데 이어 공 또한 초시(初試)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초지(初志)를 바꾸어 사환(仕宦)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치가(治家)에 힘써 어버이를 받드는데 지체(志体)의 봉양을 다하였고, 형제간에 우애 우독 하였으며 집안 간에 매우 돈목하였으므로 고을에서 칭송이 높았다.
배위는 은진 송씨(宋氏)로 아버지는 사직(司直) 계중(繼中)이고, 조고(祖考)는 처사 쌍청당(雙淸堂) 유(愉)이다. 부덕(婦德)이 현숙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집안이 화목하였으므로 문중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으며 서거 후 공의 유택에 상하분(上下墳)으로 모셨다.
2남 3녀를 두셨으니 장남 윤경(胤慶)은 참봉을, 차남 후경(後慶)은 진사에 급제하여 직장(直長)을 지냈다. 장녀는 무송인 윤삼계 부사(戊松人尹三繼府使)에게, 차녀는 남양인 홍득종 상장(南陽人洪得宗上將)에게, 삼녀 또한 윤사임 부사(尹思任府使)에게, 출가하였다.
장남 윤경은 일남 필 찬성사(弼 贊成事)를 차남 후경(後慶)은 일남 협도(協道)를 두었는데, 협도(協道)는 조산대부내자시직장(朝散大夫內資寺直長)을 지냈고, 장손 필(弼)은 이남을 두었는데, 수호(壽豪)는 안동부사(安東府使)이고, 사겸(仕謙)은 현감(縣監)이다.
차손 협도(協道)는 일남 유량(有良)을 두었는데, 진사(進士)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을 지냈고, 장증손 수호(壽豪)의 일남 윤(潤)은 이천현감(伊川懸監)을, 차증손 사겸(仕兼)의 일남 은(殷)은 동중추(同中樞)를 지냈다. 차증손 유량(有良)의 일남 철형(鐵衡)은 출천지효 (出天之孝)로 중종(中宗) 12년에 효자 정려의 명을 받았다.

아! 공의 훌륭하신 그 음덕은 7세 8세손에 뻗치어 1문2정려를 위시하여 6형제가 문무과에 급제하여 대관을 배출하는 광영을 누렸고 아울러 자자손손이 끝없이 융성 발전하여 황해도 연백 은률 벽성 등지에 수천호가 산거(散居)하고 있다.
 
공의 초장지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서초동 산185번지이었으나 묘역 일대가 정부의 공용청사부지로 책정되어 부득이 오백년 안면지지(安眠之地)를 떠나 1985년 4월에 이곳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 북성산 아래로 선영과 함께 이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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