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정연경(鄭延慶) 철원부사
통정대부 철원 도호부사 정공 행장
(通政大夫鐵原都護府使 贈嘉善大夫 承政院都承旨 兼經筵參贊官 尙瑞院正 鄭公行狀)
공의 휘는 연경(延慶), 자는 흥조(興祚)이다.
시조 휘 숙(肅)은 고려 대 시중(侍中)이고, 아버지의 휘는 침(忱), 호는 정안재(靜安齋)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으로 노릉(魯陵)의 화에 연좌되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고, 어머니는 화순 최씨(崔氏) 대사성(大司成) 자빈(自濱)의 따님이다.
공은 일찍이 문학에 종사하였으나 마침내 성취하지 못하고 음보(蔭補)로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거쳐 상서원 직장(商書院直長)을 역임하였고, 누차 낭서(郎署)와 주부(州府)를 거쳐 마전군수(麻田郡守)를 역임하여 최상의 치적으로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라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제수되었다가 모년 5월 8일에 별세하자, 가선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상서원정(嘉善大夫 承政院 都承旨 兼 經筵參贊官 尙書院正)에 추증되고, 풍덕(豊德) 덕수면(德水面) 유좌(酉坐)에 장사지냈는데, 그 묘지는 허암(虛菴)이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배위는 청주 경씨 도사(都事) 월봉(月俸) 간(侃)의 따님이자, 호조판서 지(智)의 증손이고, 호군(護軍) 증 참판 양천(陽川) 허추(許樞)의 외손으로, 1501년 정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소생은 6남 1녀인데, 장남 희량(希良)은 한림(翰林)으로 호가 허암(虛菴)이고, 차남 희검(希儉)은 진사에 증 이조참판으로 호가 어은(漁隱)이다. 다음으로 희신(希信)은 우후(虞侯)로 증 도승지이고, 다음으로 희창(希昌)은 사과(司果) 다음은 희발(希發), 다음은 희윤(希尹)이다. 1녀는 안동 권전(權佺)에게 시집갔다.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느라 가승(家乘)이 산락(散落)하여 그 생·졸 연월과 경부인(慶夫人)의 묘소가 아울러 실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