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정흥경(鄭興慶) 청도군수
통훈대부 청도군수 정공 행장(通訓大夫淸道郡守 鄭公行狀)
공의 휘는 흥경(興慶)이고, 자는 길보(吉甫)이며, 정도공(貞度公)의 증손이며, 동지공 휘 충석(忠碩)의 손자이다. 아버지 휘 침(忱)은 문과에 올라 통정대부 호조참의(通政大夫戶曺參議)에 이르렀고, 어머니 숙부인 화순최씨(和順崔氏)는 휘 자빈(自濱)의 따님이다.
신미(1451) 2월 10일에 공이 태어나 기축(1469)에 음보(蔭補)로 전력부위(展力副尉)가 되고, 21년 을사(1485)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그 복을 마친 후 사용부사정(司勇副司正)에 임명되었고, 무오년(1498) 봄에 북부참봉(北部參奉)이 되고, 신유년(1501)에 전옥서(典獄署)로 옮겼으며, 갑자년(1504)에 풍저창 봉사(豊儲倉奉事)로 전임하고, 을축년(1505)에 직장(直長)으로 승진되었다.
정덕(正德) 원년(1506)에는 사온서(司醞署)로 옮기고, 정묘년(1507)에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그 복을 마친 후 임신년(1512)에 다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서용되었다.
계유년(1513) 에는 사도시 주부(司寺主簿)로 승격하고, 갑술년(1514)에는 연산현감(連山縣監)으로 나아가 그 임기가 끝난 후 선공감판관 (繕工監判官)이 되고, 얼마 후에는 사온서령(司醞署令)으로 옮기었다.
경진년(1520)에는 한성부 판관 (漢城府判官)이 되고, 신사년(1521)에는 4품계에 올라 사재감(司宰監)·사도시(司寺)의 첨정(僉正)을 역임하고, 그해 겨울에는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나갔다. 부임한 지 5년 만에 연로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읍인(邑人)들이 유임을 호소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부임할 것을 특명하여 백성들의 여망을 따르려 하였으나 떠나기 전에 병들어 본제(本第)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을유(1525) 9월 7일로서 향년이 75세이다. 그 해 겨울 11월 6일 여주 남쪽 문곡(文谷) 건금산(乾金山)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성품이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고 청렴 근실로 봉직하여 산업을 영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군현(郡縣)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되, 모두 떠난 뒤의 사모하는 마음을 지니게 하였다.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예로서 자신을 지켰으며, 부부 사이에도 서로 존경하기를 손님 대접하듯 하였다.
그러므로 숙인 유씨(柳氏)는 연로한 후에도 반드시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몸을 단장한 후에 공을 보았고, 감히 설복(褻服)으로는 공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비복(婢服)들도 또한 효성을 지녔다. 반드시 배궤응대(拜跪應對) 하였으므로 집안이 항상 숙연하여 보는 사람마다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지극한 선조를 받드는데 성심을 다하고 제사를 받드는데 엄하게 규칙을 세워, 풍부하여도 지나치게 사치를 하지 못하게 하고 빈약하여도 지나치게 약소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결하도록 하고 조상들이 곁에 있는 듯이 여기는 정성을 다하게 하였다. 거상(居喪)에 있어서는 슬픔을 다하고 삼년동안 시묘를 살아 한결 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므로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이르기를
『사대부들로서 우리 고을에서 집상(執喪)하는 자가 많기도 하였지만 일찍이 이 사람과 같은 성효(誠孝)는 보지 못하였다.』
하면서 사실을 들어 방백(方伯)에게 알리기까지 하였으며, 아직까지 고을 부로(父老)들이 그 당시의 일을 어제 있었던 일 같이 말하고 있으니 이 어찌 그 아름다운 덕행이 사람을 감동시키는데 깊어서 오랠수록 더욱 민멸되지 않는 까닭이 아니랴. 공이 자제를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여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을 경우에는 예제에 의해 엄격히 책망하였다.
뭇 조카들이 혹시 서찰(書札)을 올렸을 때 자획이 약간이라도 크면 반드시 이르기를 『너희들이 근래에 마음의 병을 얻지나 않았는가? 왜 이런 실수를 하느냐?』고 하였다. 형의 아들 희검(希儉)이 대상(代喪)으로 같은 여막(廬幕)에 거처하였는데, 마치 엄한 스승처럼 섬기면서 부복시좌(俯伏侍坐)하되 3년 상이 끝나도록 하루같이 하였다.
이를 보아서도 공이 자제를 대함에 그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록 공께서 타고난 천품이 본래 그러하다고 하겠으나 참으로 그 가정교훈에 있어 덕행과 선행을 보고 들은 것이 이목(耳目)에 무젖지 않은 이라면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우리 선대의 가법이 이처럼 올발랐음을 여기에서 더욱 징험할 수 있다.
숙인 유씨(柳氏)는 또한 진주의 명벌(名閥)로서 부호군(副護軍) 식(殖)의 따님이며 군자정(軍資正) 향(珦)의 증손녀다. 경오(1450) 2월 17일에 태어나 임인(1482)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묘는 공의 분묘 좌측에 있다. 계실(繼室)은 의령 남씨(宜寧南氏)로서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임(任)의 딸인데, 자녀를 두지 못하였으며, 갑오(1534) 8월 15일에 세상을 떠나 양주(楊州) 어룡산성(魚龍山城) 선구(先舅) 참의공(叅議公)의 묘 곁에 장사지냈다.
유씨(柳氏)가 1남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희문(希文)으로 선무랑(宣務郞)이고, 장녀는 첨정(僉正) 정수(鄭洙)에게 시집갔는데 뒤가 없으며, 차녀는 증판중추부사(贈判中樞府事) 한계금(韓繼金)에게 시집갔다. 선무(宣務)는 종실(宗室) 조천부정(助川副正) 이손(利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언충(彦忠)으로 사직(司直)을 지냈고, 차남은 언효(彦孝)로 판관(判官)을 지냈다.
사직은 3남을 낳았는데, 유(愉)·선(宣)·회(恢)이고, 판관은 1남을 낳았는데 연(淵)이고 벼슬은 주부(主簿)이다. 중추(中樞)가 1남 승권(承權)을 낳았는데 첨지(僉知)이다.
첨지가 3남을 낳았는데 장남 경복(景福)은 광흥수(廣興守)가 되고, 차남 경록(景祿)은 청원위(淸原尉)로서 중종대왕(中宗大王) 제2녀를 아내로 맞았고, 3남 경우(景祐)는 군수가 되었다. 내외 현손들은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이하 생략)
5대손 통훈대부 행 황해도 도사 겸 춘추관 기주관(通訓大夫 行黃海道都事兼春秋館記注官) 도영(道榮)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