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정필
가선대부 찬성사 정공 묘표음기(嘉善大夫贊成事鄭公墓標陰記)
공의 휘는 필(弼)이다. 정도공(貞度公)의 둘째 아들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휘 충석(忠碩)이 공의 증조이며 생원공 휘 변(忭)은 공의 조부이며 참봉공 휘 윤경(胤慶)은 공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화순 최씨(崔氏)로 계묘(1483)9월 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풍의(風儀)가 준결(峻潔)하고 품성이 단엄(端嚴)하였으며 처신이 정대하고 언사에 법도가 있었으며 효도를 근본으로 하고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재주를 가져 문예(文藝)가 숙성(夙成)하여 사람들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므로 저마다 식형(識荊 : 명성만 듣고 있던 사람을 만나 는 것)을 원하였고 평소에 붕당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속류(俗流)의 기탄(忌憚 어렵고 거북하게 여김)이 되었다.
중종때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는데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직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한 적이 없었으며, 간언(諫言)이 곧아 숨김이 없었고 지론이 공정하여 사(私)가 없었으며 집법(執法 : 법을 지킴)이 정대하여 흔들림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일찍이 이르기를 『옛날에 어진 보필(良弼)이 있었는데 경의 이름이 과연 헛되이 얻어지지 않았다.』(공의 이름이 필(弼)이므로 이 같이 말한 것임)하고 큰물에 다니는 배와 가문 날에 내린 비에 비유하였다.
마침내 임인(1542)년 2월 1일에 60세를 일기로 병에 의해 집에서 별세하였고 그 해 어룡성산(漁龍城山) 곤좌에 장사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청풍 김씨로 시부모를 섬기는데 효성을 다하였고 남편을 받드는데 뜻을 어김이 없었는데 공보다 11개월 뒤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에 합폄하였다.
소생은 2남으로 장남 수호(壽豪)는 안동부사(安東府使)이고 차남 사겸(士謙)은 전의현감(全義縣監)이며, 손자와 증·현손(曾玄孫)은 다 기록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