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정언각 고죽재공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고죽재 정공 비음기(嘉善大夫戶曹叅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孤竹齋鄭公碑陰記) 공의 휘는 언각(彦慤)이고 자는 근부(謹夫)이며 호는 고죽재(孤竹齋)이며 정도공(貞度公), 휘 역(易)의 5대손이다.
아버지 희검(希儉)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고 어머니는 평산(平山) 신씨(申氏) 생원 승준(承濬)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공은 무오(1498)에 태어나서 병자(151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계사(1533)년 문과에 급제하여 맨 처음 예문관(藝文館)에 뽑혔다가 얼마 후에는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되었다.
이후부터 오랫동안 경연(經筵)에 있었고 여러번 시강원(侍講院)에 옮겨 임명되었으며, 네 차례나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여섯 차례나 간관(諫官)의 임무를 다하였다.
또 하관중서(夏官中書: 병조의 벼슬이름)를 거쳐 오래동안 승지에 재직하였고 세 차례나 관찰사와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신병으로 한가로이 중추부에 있은 지 1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병진(1556) 8월 29일이었다.
이해 10월에 양주 장흥면 부곡(釜谷)의 서쪽산 은행정(銀杏亭) 자좌(子坐)에 장사지냈고 춘추는 59세였다.
부군은 장중·간후(莊重簡厚)했는가 하면 처신이 정대(正大)하고 처사가 단호하였으며, 여러 조정을 내리 섬겼으나 홀로 우뚝 서서 항시 정성을 다하여 나라에 죽기로 각오했었다.
부인은 고령 신씨(申氏) 우참찬(右叅贊) 공제(公濟)의 따님으로 자녀 9명을 두었다. 장남 척(惕)은 기유(1549)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경기도사(京畿都事)가 되었고 다음으로 구(懼)는 일찍 죽었으며 신(愼)과 복(幅)은 학문에 뜻을 두었고 장녀는 봉사(奉事) 김희순(金希舜)에게 다음은 이찬금(李纘金) 방헌침(方獻忱) 유화(柳和)에게 각기 시집갔으며, 5녀는 어리다. 내외로 손자는 20여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