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정희검 어은공

성균진사 어은 정공 묘지(成均進士 贈嘉善大夫 吏曹叅判 同知義禁府事 漁隱鄭公墓誌)공의 휘(諱)는 희검(希儉)이고, 자(字)는 조우(祖禹)이며, 자호(自號)는 계양어은(桂陽漁隱)이다.
아버지 휘 연경(延慶)은 철원 도호부사(行鐵原都護府使)로 증직이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경연 참찬관(經筵叅贊官)을 겸하였으며, 어머니는 청주경씨 진위부위(振威副尉) 간(侃)의 따님으로 망족(望族)인 전 시중(侍中) 복흥(復興)의 후손이다.
공은 임진(1472) 11월 11일 계유에 태어나서, 어릴 적부터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고 형제 사이에 우애를 다하여, 평생의 효·우(孝友)가 그 천성에서 나왔다. 시묘(侍墓)하는 동안에 제수를 손수 장만하여 하루도 태만함이 없었으니, 이는 도(道)를 들어서 안 것이었다.
묘사(廟祀)를 지낼 적에는 직접 음식 만드는 이를 대하고 주방을 거쳤는가 하면, 마음을 재계(齋戒)하고 의복을 깨끗이 하여 생존한 이를 모시듯 공경을 다하였으니, 이는 도를 보아서 안 일이다.
집안 살림을 분배할 적에는 스스로 값없는 물건 만을 취택하였고, 장가 못 든 아우를 위해 힘껏 혼수를 마련하였으며, 모든 자질(子侄)을 의로써 가르쳤고, 가난한 집안을 은혜로써 감싸 주었다.
백씨인 허암(虛庵)을 따라 함께 유학(遊學)하여 일찍부터 시 잘한다는 소문이 당세에 알려졌다. 1498년 무오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연산(燕山)의 혼란한 정치를 만난 이후로 세상일에 뜻이 없어 공명을 초개처럼 보았다.
끝내는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고 시·주를 즐기면서 한 세상을 비웃으며 살았다. 마음은 희황(羲皇 : 복희씨를 뜻함)에 있었고 정신은 우주(宇宙)에서 노닐었으니, 참으로 도연명(陶淵明) 소강절(邵康節)의 흉금과 같았다. 혹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하는 이가 있으면, 마치 자신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기었다.
만년에는 병이 많아 10여년 동안 손님을 사절하다가, 갑진(1544년)에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선부군(先府君)의 영귀(榮貴)로 인하여 이조판서 동지의금부사(吏曹判書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배위 평산 신씨(申氏)는 생원 휘 승준(承濬)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의연(毅然)하고 가법이 엄격했을 뿐더러,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집안 간에 화목하였으며, 부군의 뜻을 삼가 받들어 시종 어김이 없었다.
계사(1473)년 2월 병자에 태어나서 정해(1527)년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고, 성산(星山) 선영에 공과 더불어 합폄되었다. 1남1녀를 두었는데, 1남은 언각(彦慤)이고 1녀는 별제(別提) 이규(李珪)에게 시집갔다. 언각은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척(惕)으로 기유(1549)년 문과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구(懼)·신(愼)·핍(偪)이다.
큰 딸은 전생서 봉사(典牲暑奉事) 김희순(金希舜)에게, 다음은 충의위(忠義尉) 이찬금(李纘金)·선교랑(宣敎郞) 방헌침(方獻忱)· 유학(幼學) 유화(柳和)에게 각기 시집갔고, 핍(偪)과 막내딸은 아직 성혼(成婚)하지 못하였다. 별제(別提)는 1남을 두었는데, 언성(彦誠)이고, 내외의 증손(曾孫)은 20여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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