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량(鄭希良) 허암공

허암공(虛庵公) 행장
공의 성은 정이요, 이름은 희량(希良)이요, 자는 순부(淳夫)요, 본은 해주다. 증조의 이름은 충석(忠碩)이니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침(忱)이니 통정대부로 호조참의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연경(延慶)이니 통훈대부로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지냈다. 어머니 경씨(慶氏)는 고려조에 시중을 지낸 득흥(得興)의 후손인 간(侃)의 따님이다.
성화(成化) 5년(1469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총명하고 민첩하여 뭇 아이들과 달랐다. 할아버지 참의공께서 동방여지승람(東方輿地勝覽)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문장을 배우는 사람이 먼저 보아야 할 책이다. 네가 뒷날 나 보고 옳게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했다. 
신해(1491년)에 국자과시(國子課試)에 오동부(梧桐賦)를 지어, 크게 참판 신종확(申從濩)에게 알린바 되었다. 이듬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갑인(1494년) 겨울에 성종(成宗)께서 승하했을 때, 성균관 유생과 사학(四學) 및 밖에 있는 유생 수천명을 인도하여, 흰옷을 입고 대궐 앞에 엎드려 통곡하고 글을 올려 임금님의 불공을 드리는 것이 옳지 못함을 남김없이 말했는데 그 내용에 너무 지나치게 바른 말이 들어 있는지라 이듬해 봄에 해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여름에 귀양에서 풀려 돌아와 과거에 급제한 뒤 승문원(承文院)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뽑혔다.
이듬해 예문관에 천거되어 검열(檢閱)이 되었고, 그 이듬해 봄에 글을 올려 대궐 안의 일을 말했는데, 글 속에 밝으신 임금이 한밤중에 사사로이 한 말을 뒷사람이 모르지 않는 것이 없다는 비유까지 들어 있었다.
여름에 여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는 은전을 베푸니 대개 높게 뽑힌 것이었다. 무오(1498)년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니 나라에서 의원과 약을 내리고 임금의 명을 받아 문병하는 사람이 하루도 그치지 않으니, 친구들이 글을 지어 다투어 이를 위로했다.
뒤이어 대교(待敎)와 봉교(奉敎)에 이르고 가을에 김일손(金馹孫)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니, 그 일이 사관(史官)에게 미친지라, 매를 맞고 의주(義州)로 귀양가게 되니 같은 날 벼슬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27명이나 되었다.
경신(1500)년에 김해(金海)로 옮겨졌다가 그 이듬해 1월에 어머님 상을 당하고 9월에는 천변(天變)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게 되니, 곧 덕수(德水)에 있는 선산(先山) 옆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이 때 연산군의 포악이 심해져 나라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는지라, 공은 때를 슬퍼하고 걱정하며 원통하여 스스로를 옛날 중국 초나라의 굴원(屈原)에 비유하고 조강(祖江)에 몸을 던지니 이날이 임술(1502)년 5월 5일이었다. 남긴 옷을 가지고 고양(高陽) 성산(星山) 선영 옆에 장례를 지냈다. 누군가가 그 무덤을 두고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惆悵    輪何處邊 뜻 잃은 미친 수레는 어디로 갔고,
水雲蹤跡去悠然 물처럼 구름처럼 자취도 아득하여라. ,
東人尙道千年事 나라사람은 아직도 천년 일을 말하노니,
楚俗同悲五月天 초나라 풍속은 함께 5월 하늘을 슬퍼하네.
甲子巳知危戊午 갑자년이 무오보다 더 위태로움을 이미 아니
翰林爭似作神仙 선비들은 다투어 신선이 되었다고 말하네.
虛墳新墓今猶在 새로 만든 빈 무덤이 아직도 남아
與我先塋隅一阡 우리 선영 한쪽 귀에 함께 하였네.


공은 원래 주역이치(易理)에 밝아 앞일을 잘 맞혔는데, 일찍이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무오사화(戊午士禍)보다 더 심할 것이니 그때 나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더니 과연 강에 빠져 스스로 화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세상에선 혹 말하기를 『물에 빠진 것처럼 보이고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글 지은 사람의 말은 대개 이를 가리킨 것이다. 강릉최씨로 유수(留守) 벼슬을 지낸 진(璡)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뒤가 없는지라 공의 아우 우후(虞候) 희신(希信)이 공의 뜻을 받아 그 제사를 맡아 왔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그 후손들이 평안도 정주에 거주하고 있음이 알려져 족보에 실렸다. 허암집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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