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정선(鄭宣) 퇴휴당

중훈대부 예빈시부정 의사 정공 묘갈음기(中訓大夫禮賓寺副正義士鄭公墓碣陰記)
공의 휘는 선(宣)이며, 자는 자정(子正)이고, 호는 퇴휴당(退休堂)이다. 정도공(貞度公) 휘 역(易)이 공의 6세조가 된다. 호조 참의 정안재(靜安齋) 휘 침(忱)은 공의 고조가 되고, 군수를 지낸 휘 흥경(興慶)은 공의 증조가 된다. 아버지는 사직공(司直公) 언충(彦忠) 이며 어머니는 개령(開寧) 홍씨(洪氏)이다.  
병오년(1546) 2월 20일에 공은 도하(都下)에서 태어났는데, 그 총명함이 같은 유에 뛰어나고 기국이 범상치 않았다. 7세 때 이미 사부(詞賦)를 지을 줄 알았고, 10세 때 경전(經傳)을 모두 통하였다. 20세에 예학(禮學)이 진취되어 자못 선현장자(先賢長者)의 기품이 있으므로 이웃에서는 이학군자(理學君子)라고 일컬었다.
공의 선고께서 7년 동안 병석에 있었고 선비 또한 4년 동안 몸져누웠는데, 밤낮으로 울면서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했다. 2년 동안 병시중을 하루같이 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건금산(乾金山) 묘소에 시묘를 살면서 지나치게 슬퍼하였다.
6년 동안 여막을 지키면서 한결 같이 초상 때와 같이 하였으므로 도내 장보(章甫: 선비)들이 함께 일어나 도백(道伯)에게 보고한 적이 많았으니 사대부치고 그 누구인들 흠탄하지 않았으랴.
중년에는 건금산에 집을 짓고 항상 묘소 곁에 있으면서 손에는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놓지 않았으며, 항상 책상에 있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대하고 세월을 보내면서 수시로 묘역을 돌아보았다.
하루는 묘역을 돌아보다가 마침 검은 입을 가진 괴이한 벌레가 솔잎을 둘러싸고 있어 그 솔잎이 거의 없어졌다. 갑자기 놀래어 그 벌레를 하나하나 잡으면서 하늘을 우짖어 울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한 떼의 붉은 새가 남쪽으로부터 날아와 그 벌레를 모두 다 쪼아 먹고 날아가 버렸다. 이것이 과연 하늘이 낸 효자인 것이다. 친척과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여 이는 공의 성효(誠孝)라고 하였으나 실은 가문을 전하는 업효(業孝)로서 대대로 행하여 끊어지지 않았으니 온 나라를 통해 드문 일이다.
이 어찌 훌륭하지 않으랴. 임진년(1592)에는 왜변(倭變)을 듣자 북쪽으로 대궐을 향해 절하고 건금산 중으로 들어가 밤낮으로 3일 동안 통곡, 자주 칼을 빼어 동쪽을 향하면서 그 강개한 마음을 참지 못하였다.
끝내 충의를 분발하여 문두원(文頭院)에 의병소(義兵所)를 설치하고 한남(漢南)에 격문을 보냈다. 이때 조중봉(趙重奉)·고제봉(高齊峯) 등이 이 사실을 듣자 칼을 치며 이르기를,
『한동(漢東)에도 또한 사람이 있었는가. 정공(鄭公)은 참으로 의사(義士)로다.』하였으니, 이는 효를 충으로 옮긴 것이다. 백의종군자(白衣從軍者) 삼백여명이 원근 향읍(遠近鄕邑)에 두루 통고하여 여양(驪陽)에 집회하자, 여주·이천·광주 3읍이 기약도 없이 차례로 향응하여 향병(鄕兵)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군세는 점점 진작되었고 자주 왜적을 쳐 승리하였다. 북평사(北評事) 농포(農圃)가 북관(北關)의 반민(叛民)과 왜적을 치다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족숙(族叔) 또한 창의(倡義)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덕행이 아니랴.』고 하였다.
군공(軍功)으로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내렸으나 공은 벼슬하지 않고 건금산에 퇴와(退臥)하여 5년 후인 무오년(1618) 12월 4일 본제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73세였다. 이듬해 기미년 2월 17일 여주 흑석 문두원 갑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영산 신씨(靈山申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생원 수일(守一)의 따님이며 상장군 은보(殷輔)의 증손녀이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광업(光業)이고, 차남은 광렬(光烈)이며, 3남은 광서(光緖)이다. 딸은 경주인(慶州人) 생원(生員) 설거인(薛居仁)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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