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정신(鄭愼) 판서공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행 통정대부 대사간 정공 유사
(贈資憲大夫禮曹判書謙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弘文館提學世子左賓客行通政大夫大司諫鄭公遺事)
공의 휘는 신(愼), 자는 군성(君省)이다. 중종 33년 무술(1538) 정월 28일에 태어나서 명종 16년 신유년(1561)에 사마 생원시 3등 제2명과 진사시 1등 제2명으로 합격하고 20년 갑자(1565)에는 율곡(栗谷)과의 동방(同榜)으로 을과 제 1위에 올랐으며, 조정에 있은 지 41년 동안에 통정대부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이르러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역임하고 선조 37년(1604) 8월 19일에 67세를 일기로 병에 의해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자헌대부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제2남 충의공(忠毅公)의 영귀(榮貴)에 의한 것이다.
공은 가학(家學)을 이어 받아 문예(文藝)가 일찍 이루어지고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며, 또 성력(星曆)을 잘 추수(推數)하여 그 예언이 반드시 적중되곤 하였으니, 이는 맥락이 허암공(虛菴公)에서 이어진 것이다.
공은 천성이 엄정하여 집안을 다스리는데 매우 법도가 있고, 내외가 절연(截然)하여 안팎의 말이 드나들지 않았다. 아들 삼재(三宰 : 좌찬성)가 이미 장성한 때에도 일과의 독려를 아이나 똑같이 하였고, 자질 중에 조금의 잘못만 있어도 곧 회초리로 때렸다.
만년에는 충의공(忠毅公)의 작질(爵秩)이 이미 비의(裶衣)에 이르러 공주목사로 있었으나, 어느날 충의공이 술자리에서 취하여 돌아와 중문 밖까지 이르자 말에서 내리더니, 그 위졸(衛卒)을 시켜 초달(楚撻)을 가하였다.
그 뒤에 큰 증손부가 우귀(于歸)하는 날에는 그 고모부인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전송하면서 경계하기를, 내가 듣건대, 너의 시가에 가법이 지극히 엄정하여, 이미 삼품 지위에 오른 아들에게 위졸을 시켜 초달을 가했다 하니, 이 어찌 사람의 집안에 흔히 있는 일이겠느냐. 너의 시가의 전형(典型)이 지금까지 쇠퇴하지 않았으니, 너는 모름지기 아침저녁으로 조심해서 부도(婦道)를 힘써 부모에게 부끄러움을 끼치지 말라.』하였으니, 공의 가법이 엄정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바가 이러하였다.
아! 공은 풍의(風儀)가 준정(峻整)하고 재학(才學)이 통박(通博)한 때문에 소시적부터 지구(知舊)와 친척이 저마다 공보(公輔)의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조정에 있은 지 41년 동안에 안으로는 낭서(郎署)에 녹록(碌碌)하였고 밖으로는 주부(州府)에 서성이다가, 말년에 이르러 현로(顯路)에 발탁해야 한다는 의론이 있었으나, 다만 급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하여 끝내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으니, 유감스러운 일이다.
배위 정부인 강릉(江陵) 김씨는 장사랑(將仕郞) 흥례(興禮)의 따님이자 가선대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호(瑚)의 손녀이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언유(彦庾)의 증손이며 통정대부 도정(都正) 전의(全義) 이순(李珣)의 외손으로 생년월일은 실전되었고, 인조 원년 계해(1623) 7월 6일에 충의공의 전주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생은 3남 1녀이고, 묘는 송산 참의공의 묘 다음 곤좌에 공의 묘와 합폄되었고 갈석(碣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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