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정용(鄭鎔) 오정공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정공 묘지(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鄭公 墓誌)
공의 성은 정(鄭)이요 이름은 용(鎔)이요 자는 백련(百鍊)이요 호는 오정(梧亭)이다. 아버님의 이름은 원희(元禧)니 사헌부의 감찰을 지내고 참판 벼슬과 해령군(海寧君)의 군호를 추증 받았다. 정부인으로 추증된 어머니 상주 김씨는 판서 광준(光準)의 따님이다.
명종 14년(1559) 12월 20일에 공을 낳으니 타고난 기품이 무척 높아 보통 사람을 멀리 벗어났고, 뜻과 생각이 뛰어나 말과 의론이 맑고 높았다. 속된 무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집에 있을 때부터 과거나 벼슬을 싫어했다.
선대에서 물려받은 것이 비록 넉넉했으나 그런 것에는 상관없이 다만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다. 열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했는데 어머님 김씨께서 가장 사랑했으므로 공이 받은 논밭과 하인 하녀가 여러 아들들보다 특히 많았다.
공은 늘 마음에 불안해했는데 뒤에 재산을 나누게 된 날 따로 받은 문권(文券)들을 모조리 불에 태우고 함께 나누는 속에 넣었었다. 또 사람들을 사랑하여 주기를 좋아하여 남이 죽거나 병들거나 급한 일이 있으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힘이 미치는 한 기어코 건져 주고자 했다.
전연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에 이사와, 온 집이 전염병에 걸려 사람이 죽고 가난하여 장사를 지내지 못하자 즉시 베 50필을 주어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일찍이 백옥봉(白玉峰) 광훈(光勳)과 매우 친하게 지내더니, 옥봉이 서울 여관에서 죽자 초상 치를 힘이 전연 없는지라 공이 딱하게 여겨 집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털어 장사를 지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의로움에 탄복했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특히 시에 능했는데 성당(盛唐) 때 시를 주로 하고 특히 이백(李白)의 시를 좋아하여 손수 한 권을 적어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읊으며 일찍이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다. 시를 잘한다는 이름이 당대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으나 과거에 응하기를 싫어했다.
한 번은 친구들의 권에 못 이겨 처음으로 과거보는 마당으로 들어가 시를 지었으나 일부러 끝을 다 맺지 않고 내놓았다.
시관(試官)이 이를 보고 절작(絶作)이라 하며 장원을 줄 생각으로 따로 두었는데, 끝내는 그것이 격식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뽑아내고 말았다. 어느 날 남의 집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일찍이 안면이 없는 이름 있는 벼슬아치를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일찍부터 공의 이름을 듣고 있는지라 문득 공에게 말하기를「내 방금 이조판서의 집에서 오는데 판서의 말이」『내가 정 아무개를 벼슬을 시키고자 한다』했는데 공의 생각은 어떻소」했다.
공이 속으로 이를 더럽게 여겨 눈을 부릅떠보고 대답하지 않으며 얼굴에 침을 뱉고 일어나니, 그 사람은 얼굴을 붉히고 어찌할 바를 몰랐고 온 방안 사람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 30년(1596)에 황해도로 피난가 연안(延安) 농사꾼의 집에서 묵고 있다가 다음 다음해 4월 3일에 병으로 객지에서 세상을 마치니 그 때 나이 41살이었다. 뒷날 용인(龍仁) 남서촌(南西村) 남향터(午向)에 새로 장례를 모시고, 맏아들이 귀하게 되므로 인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평소에 지은 많은 시와 글들은 거의가 다 전쟁으로 분실되고 사람들이 전해 외우는 것 약간 편을 책으로 찍어 내었는데, 그 중에서 이름난 작품들은 <동인시화(東人詩話)>속에 들어 있고 나머지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도 많다.
공의 부인 정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군수 황(璜)의 따님이다. 부인은 착하고 어질고 곧고 조용하여 일찍이 여자의 가르침을 받아 집안 법도가 뛰어났으며, 시어머니 봉양에 효성이 극진했고 남편을 받드는 데 조금도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이 세상을 뜨자 초상과 제사에 예를 다하고 자녀들을 가르치기를 반드시 옳은 길로서 했으며 동서 간에도 다 그들의 환심을 사고 여러 손자들이 많았으나 다 하나같이 사랑하여 어루만져 주었으며, 멀고 가까운 친척들을 대하는 데 털끝만큼 차별을 두지 않았다.
집안을 맡아 남을 두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이 다 법도가 있어 번거롭지 않았고, 하인과 하녀들을 거느리는 것도 다 그 도리를 다하여 소리치고 성내는 일이 없이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지니 감복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보다 46년 뒤인 을유(1645)년 6월 5일에 수원(水原) 농가에서 85살로 세상을 마치니 그 해 9월 어느 날 공의 무덤 왼쪽에 붙여 장례를 모셨다.
세 아들과 세 딸이 있는데 맏아들 승(勝)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벼슬에 오르고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둘째 아들 잉(媵)은 벼슬하지 않았고, 셋째 등(騰)은 찰방을 지냈으며, 맏딸은 현감 이유원(李幼源)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군수 홍명현(洪命顯)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이홍엽(李弘燁)에게 시집갔다.(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