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정윤(鄭潤) 이천현감

통훈대부 행 이천현감 정공 묘갈음기(通訓大夫行伊川縣監鄭公墓碣陰記)
공의 휘는 윤(潤)이고, 자는 도성(道成)이다. 조고 휘 필(弼)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고, 아버지 휘 수호(壽豪)는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지냈으며, 어머니 숙부인 청주 한씨는 진사 자정(自貞)의 따님으로, 경자(1540) 정월 1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이 돈독하였다. 10세 때 어버이가 병을 얻자, 시탕(侍湯)하는 절차를 주야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상을 당해서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 마치 생을 그만 두려는 듯하였으며, 장사 지낼 적에는 예제(禮制)를 다하여 엄연히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았으므로, 조문하는 이가 저마다 감탄하였다.
3년 동안 시묘하여 피눈물을 뿌려 묘목(墓木)을 고사(枯死)시켰으며, 상을 마친 뒤에도 남은 슬픔이 항시 초상 때와 같아 그 묘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선영 아래 집을 지어 기거하였다.
이에 과업(科業)을 폐지하고 조용히 독서하면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으므로 문사(文詞)가 전아하여 명성이 일찍부터 알려졌다.
임오(1582)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서용(敍用)되어 지법(持法)이 공평하고 핵론(劾論)이 준엄하였다. 정해(1587)에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갔을 때는 큰 흉년을 만나 굶어 죽은 자가 줄을 이었었다.
이때 창고를 열고 곡식을 풀어 주어 이산자(離散者)가 안도(安堵)를 얻게 하였으므로, 「소생(蘇生)하게 되었다」그는 칭송이 한(漢) 나라의 명관 두시(杜詩)와 소신신(召信臣)에 비할 만하였다.
지방관으로 있은지 5년 동안에 정화(政化)가 청흡(淸洽)하여, 공정(公庭)에 미결된 송사(訟事)가 없었고 백성은 자모(慈母)처럼 따랐으며, 만기가 되어 체귀(遞歸)될 적에는 이민(吏民)들이 수레를 붙잡고 재임을 원하였으나 끝내 그대로 되지 않자, 다만 돌을 세워 덕정(德政)을 칭송하였다.
신축(1601) 8월 15일에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배위 숙인(淑人) 우계 이씨(李氏)는 찰방(察訪) 세정(世貞)의 따님으로, 공보다 4년 먼저 별세하였으며, 묘는 간월산(看月山) 갑좌(甲坐)에 안장되었다.
1남 문국(文國)은 신유년의 진사로 시·예(詩禮)를 숭상하였으니, 이는 정훈(庭訓 : 가정의 교훈)으로 말미암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