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정척(鄭惕) 행촌공

통정대부 승정원 우승지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행촌 정공 비음
(通政大夫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兼同知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世子右副賓客 贈嘉善大夫吏曹參判杏村鄭公碑陰)
공의 성은 정이고, 휘는 척(惕)이며, 자는 군길(君吉)로 대녕(大寧) 사람이고, 찬성사(贊成事) 정도공(貞度公) 역(易)의 六대손이다.
증조 휘 연경(延慶)은 철원부사이고 조(祖) 휘 희검(希儉)은 이조 판서(贈吏曹判書)이며, 아버지 휘 언각(彦慤)은 호조참판이고, 어머니는 정부인으로 고령 신씨(申氏) 좌참찬 공제(公濟)의 따님이다.
공은 정축년(1517)에 태어나서 계묘년(1543) 사마시에 합격하고 기유년(1549) 문과에 급제 맨 처음 승문원(承文院)·한림원(翰林院)에 발탁되었다가 주서(注書)로 전임하고, 홍문관정자(弘文舘正字)를 거쳐 수찬(修撰)·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사간원에서는 정언·사간으로, 사헌부에서는 지평(持平)·장령(掌令)으로 있다가 양남(兩南 : 영남과 호남)과 서·북(西道와 北關)의 수의 어사(繡衣御史)로 나갔다.
공은 재명(材名)이 일찍부터 알려졌고 그 실천은 다 가정의 교훈에 의거 일체를 강의(剛毅)로써 스스로 지키어서 한림원(翰林院)에 있을 때 양리(良吏)로 추천받았고, 권귀(權貴)들의 사사로운 간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 뒤 三사(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물망에 올라 장차 전조(銓曹 : 이조와 병조의 통칭)까지 맡게 되었으나, 공을 꺼리는 자가 이전의 원한을 기념하여 요로(要路)를 가로막으려 하였고, 얼마 후에는 척신(戚臣 : 윤 원형)이 권세를 휘둘러 나라를 위협하고 어진이를 방해하였으나 공이 강경히 굽히지 않았으므로 끝내 어리석고 무식하다하여 유배시키기에 이르렀다.
이후부터 수년 동안은 배척되어 있다가, 혹 예·병·형·공조(禮·兵·刑·工曹)의 낭관(郎官)이 되기도 하고 혹은 호남·경기의 막관(幕官)이 되기도 하여, 벼슬길에 막힘이 많았다. 겨우 통정의 품계에 올라 우승지(右承旨)로 승진되었으나, 조정의 평의(評議)가 크게 달라졌다.
황주·상주 두 고을의 목사가 되어 행정이 맑고 검소하였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간이(簡易)했던 때문에 그 끼친 사랑은 오래오래 영세토록 잊지 못하였다.
정묘년(1667)에 벼슬을 그만 두고 집에 돌아온 지 26년 만에 금강(金江) 상류로 이주하여 자호(自號)를 행촌(杏村)이라 하고 조용히 지조를 지켰다. 생업에는 유의하지 않고 뭇 자손들과 더불어 서·사(書 史)를 탐구하여 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진년(1592)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복직되었고, 병신년(1596) 8월에 쌍문리 옛집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양주 선영 아래 자좌(子坐)에 장사지냈다.
처음 공이 영달하였을 때에는 저마다 공더러, 정리(政理)에 밝고 전고(典古)에 능하여 원만히 공보(公輔)의 기대가 있다고 추앙하였었다. 정승 이 준경(李俊慶)이 적극 끌어주고 정승 심 수경(沈守慶)이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평소 노(盧)·허(許)와의 감정으로 그 저해(沮害)를 입어 반생동안 폐척(廢斥)되어 있었고, 만년에 이르러 이 두 사람이 죽은 뒤에야 시평(時評)이 다소 풀렸는데 공의 수명이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운명인 것이다. 어찌하겠는가.
공의 첫 부인은 판서 유신동(柳辰仝)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었는데, 문영(文英)은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고, 문수(文粹)는 증 장령(贈 掌令)이며, 딸은 유학(幼學) 민봉(閔葑)과 유학 권곡(權鵠)에게 시집갔다.
후배(後配)는 봉직랑(奉直郞) 성언박(成彦博)의 따님으로, 2남 3녀를 두었는데, 문겸(文謙)은 찰방(察訪)이고 문회(文晦)는 문과에 올라 경기도사(京畿都事)이며, 딸은 문괴(文魁 : 문과의 장원) 정랑 민유부(閔有孚)와 현감 박기영(朴耆英)·교관 이극번(李克藩)에게, 측실(側室) 소생 일녀는 지사(知事) 변양걸(邊良傑)에게 시집갔다.
문영(文英)은 사인(士人) 홍순(洪純)의 딸을 맞이하여 5남을 두었는데, 문과 관찰사 조(造)와, 문과 이조참의 도(道)와, 문과 승지 규(逵)와, 유학 통(通)과, 문과 부윤 준(遵)이고, 문수(文粹)는 사인(士人) 조안(趙贋)의 딸을 맞이하여 1녀를 두었는데, 문과 저작랑(著作郞) 윤돈(尹暾)에게 시집갔고, 문겸(文謙)은 사인(士人) 신탕(愼宕)의 딸을 맞이하여 1녀를 두었는데, 현감 박유건(朴惟健)에게 시집갔으며, 문회(文晦)는 판관 윤은경(尹殷卿)의 딸을 맞이하여 1남을 두었는데, 진사 인(遴)이다.(중략) 이밖에 내외 증·현손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아! 훌륭하도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기로(耆老)나 귀인(貴人)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간곡하니,
자신들로 몰래 저절로 심복해 했으며,
강의(剛毅)로 자수하고 처사가 단호하니,
관후(寬厚)하고 장경(莊敬)한 전칙을 볼 수 있었네.
만약 그 포부 내외로 펴게 되었던들
무슨 일을 성립시키지 못했을까
초년엔 배척되고 만년에야 환원되었는데,
그 동안 30 성상에 뭇 소인(小人)이 길을 막았으나
한 생각으로 나라 걱정했네.
하늘이 사문(斯文)을 내어
세상의 본보기가 되었어라.
그 후손 수 없이 많을 것이며,
나는 공의 덕에 이의없이 돌에 명(銘)하네.

호성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사(扈聖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莚事)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전주(全州) 유영경(柳永慶)은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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