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정흠(鄭欽) 해성군

돈녕부 판관 증 호조참판 해성군(敦寧府 判官 贈 戶曹參判 海城君) 정공(鄭公) 묘갈명
공의 이름은 흠(欽)이요 자는 흠재(欽哉)요 호는 송천(松泉)이요 본관은 해주다. 먼 조상의 이름은 숙(肅)으로 고려대 문과에 급제하여 전법정랑(典法正郞) 벼슬을 지냈다. 이때부터 벼슬이 끊이지 않아 당대의 큰 집안이 되었었는데 우리 조선에 들어와 이름을 역(易)이라하는 분이 의정부 찬성과 집현전 대제학을 지내고 시호를 정도(貞度)라 하니 곧 공의 6대조가 된다.
고조의 이름은 종(悰)이니 영양위(寧陽尉)로서 문종의 따님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었고 증조의 이름은 미수(眉壽)니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영경연사(領經筵事)를 지내고 시호를 소평(昭平)이라 했으며 할아버지의 이름은 승휴(承休)니 충훈부(忠勳府) 도사(都事)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원희(元禧)로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내고 좌승지로 추증되었으며, 숙부인으로 추증된 어머님 상주 김씨(金氏)는 이조판서 광준(光準)의 따님으로 명종 12년(1557) 3월 1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이 12살에 아버님이 돌아가시니 슬퍼하며 상주의 예를 다하는 것이 한결같이 어른과 같았다. 이때 할머님 권씨(權氏)가 아직 살아 계시어 늘 소학(小學)을 입으로 외우며 공에게 가르쳤는데 공은 평생토록 이를 실천했다.
권부인께서 나이 많아 병으로 누워 계셨으므로 공은 날마다 몸소 약을 달여 병간호를 하며 여가를 틈타 글공부를 했는데 문장이 점점 나아가 20살에 초시에 합격했었다. 권부인이 세상을 버리자 무덤 옆에 집을 짓고 3년 상을 거기서 지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정승이 나라에 건의하기를『아무개는 곧 노산군(魯山君)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니 거두어 씀이 마땅하다』고 하니 선조가 곧 이를 허락했다. 처음에 선공참봉(繕工參奉)벼슬을 내리고 내섬시(內贍寺) 봉사(奉事)로 옮겼다가 다시 빙고(氷庫) 별검(別檢)이 된 뒤 풍저창(豊儲倉) 주부(主簿)로 승진된 다음 나가 대흥 현감이 되었는데 늘 청렴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스스로 힘썼다.,
뒤이어 어머님 상을 당하니 무덤을 지키며 예를 따르는 것이 할머님 때와 같았다. 이 뒤로 조용히 혼자 방안에서 지나며 평생을 마치려 했으나 늦게 양천 현령과 돈녕부(敦寧府) 판관을 지낸 것은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었다.
인조 13년(1635) 6월 2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그때 나이 79세였다. 장례는 선영이 있는 양주 해평리 서향(酉坐)터에 모셨다.
공은 성품과 행실이 순후하고 독실하며 기상이 엄격하고 정중하여 남과 오래 사귀어도 상대를 존경하고 또 조금도 농담을 주고받는 일이 없었다.
집안의 법도가 대단히 엄해서 중문(中門)안에 하인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했고 평상시에도 아무리 한여름이라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온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니 자손들도 그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더욱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사 음식은 반드시 몸소 이를 살폈다. 날마다 사당을 참배하며 늙도록 이를 계속하니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절하고 엎드렸다.
증조할머님 이씨(李氏)께서 일찍이 하인 하녀 600명을 할아버지 찬성공에게 주며 길이 종가에 물려주게 했었다.
그러나 공은 내 혼자만 많이 가질 수 없다하여 모두 여러 자매와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선대에서 끼친 일을 조심하여 지킬 뿐 한 가지도 마음속에 꾀하는 일이 없었다.
정부인으로 추증된 공의 부인 평산 신씨(申氏)는 호조판서와 판의금(判義禁)을 지낸 점(點)의 따님으로 14세에 공에게로 시집왔다. 타고난 성품이 부드럽고 착하여 공을 섬기며 거스르는 얼굴빛을 보인 일이 없었다.
공보다 2년 후에 78살로 세상을 뜨니 장례를 공의 무덤 왼쪽에 모시었다.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큰아들 효준(孝俊)은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안팎의 여러 벼슬을 거쳐 지금 해풍군(海豊君)에 습봉(襲封)되어 있다. 공이 증작(贈爵)을 받은 것은 추은(推恩)에 의한 것이다.
둘째 아들 우준(友俊)은 공보다 일찍 세상을 떴다. 큰딸은 윤희원(尹喜元)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이 된 조희일(趙希逸)에게 시집가고 셋째는 유여직(兪汝稷)에게 시집갔다.
해풍군은 첫 장가를 현감 유영하(柳永賀)의 따님에게 들어 두딸을 낳았는데 맏딸은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오른 오빈우(吳賓羽)에게로 시집가 세 아들과 한 딸을 낳았고, 둘째 딸은 성후석(成後奭)에게로 시집가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두 번째 장가든 부인과 세 번째 장가든 부인은 아들과 딸이 없었다. 네 번째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절도사(節度使)를 지낸 이진경(李眞卿)의 따님에게로 장가들어 다섯 아들과 한 딸을 낳으니, 큰아들 식(植)은 필선(弼善)으로 네 아들과 네 딸을 두었고, 둘째 익(木益)은 헌납(獻納)으로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으며 셋째 석(晳)은 지평(持平)으로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고 넷째 박(樸)은 병조정랑으로 세 아들과 세딸을 두었으며, 다섯째 적(樍)은 학문을 닦으며 두 아들을 두었고 딸은 진사 남성훈(南聖熏)에게로 시집가 다섯 아들을 두었다.
큰 사위 윤희원은 아들이 없어 안기(安基)로 뒤를 이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내고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으며 둘째 사위 조희일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 석형(錫馨)은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고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으며, 큰 딸은 권계(權洎)에게로 시집가고 둘째는 이련(李楝)에게로 시집갔다. 셋째사위 유여직(兪汝稷)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해풍군의 큰아들 식(植)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천거를 받았다. 그 밖에 안팎의 손자와 증손자와 현 손자 등 남자 여자가 모두 백여명이 넘으므로 다 기록하지 못한다.
불초한 손자 석(晳)은 아이 적에 초시(初試)에 합격 했었는데 그때 공이 어루만지고 우시며 말씀하기를 『뒷날 네가 이름을 날리게 된들 내가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고 하시었다.
지금 우리 형제와 조카자식 다섯이 함께 과거에 올라 좋은 벼슬을 지내고 있건만 공께서 세상을 하직하신지 벌써 스물네 해나 되니 슬픔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이어 눈물을 흘리며 새길 글을 지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하늘이 덕은 주시며 어찌하여 벼슬은 그다지도 아끼셨던고. 녹(祿)으로 갚으심이 후손에 있으니 복 받을 착한 일을 쌓으심이로다.
한두 구절을 삼가 말하여 이로써 돌에 새기나이다.』했다.
기해(1659)년 3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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