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정광전(鄭光前) 봉사공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행 통훈대부 전옥서 봉사 정공 묘표음기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行通訓大夫 典獄暑 奉事 鄭公 墓表陰記)
공의 휘는 광전(光前)이고, 자는 효중(孝中)이며 정씨로서 해주(海州)의 대성이다.
 의정부 찬성 시 정도공(貞度公) 휘 역(易)이 가장 드러나고 정도공의 손자 호조참의(戶曹參議) 휘 침(忱)이 공의 고조(高祖)가 된다. 고(考)의 휘는 유(愉)이고, 비(妣)는 개성 왕씨(王氏)로서 승의랑(承議郞) 휘 희주(希周)의 딸이다.
공은 병인년(1566) 3월 20일에 태어나 9세에 종숙(從叔)인 휘 관(慣)에게 출계 하였으니, 관은 곧 참의공의 제2자인 철원부사 휘 연경(延慶)의 증손이며, 우후 휘 희신(希信)의 손자이며, 생원 휘 언복(彦福)의 아들이다. 계후비(繼後)는 양천 허씨(許氏)로서 장령(掌令) 휘 사흠(思欽)의 딸이다.
공은 과거업(科擧業)을 일찍 성취하고도 출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만년에 가서 늙으신 어버이를 위해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강릉참봉(康陵參奉)·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순릉참봉(順陵參奉)·선공감(繕工監)·전옥서 봉사(典獄署奉事) 등을 역임하고 계축년(1613)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시사(時事)가 점점 틀려지는 것을 보고 초야에 잠적하여 아예 진취를 단념, 남들이 사모하는 벼슬자리 보기를 초개같이 하였다. 병자·정묘 호란 이후에는 더욱 세상일을 싫어하여 언급될 때마다 비분강개하며 오직 풍영(風詠)으로 소일하였다.
무인년(1638) 8월 19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72세였다. 그 해 12월 14일 부평부(富平府) 서쪽 산북리(山北里) 선영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숙인 유씨(柳氏)로서 고흥(高興)의 망족(望族)이며, 고려의 명상 청신(淸臣)의 후예이다. 고(考) 휘 회(淮)는 현령이고, 비(妣)는 서산 정씨(鄭氏)로, 부호군(副護軍) 세충(世忠)의 딸이다. 계해년(1563) 6월 10일에 태어나 임술년(1622) 12월 4일 공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 향년이 60세다. 이듬해 4월 11일 장례하니 지금 공의 분묘와 동혈(同穴)로서 모두 해좌(亥坐)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도형(道亨)은 문과(文科)에 올라 정랑(正郞)이 되었다. 차남은 도성(道成)이고, 3남 도영(道榮)은 문과에 올라 박사(博士)가 되었으며, 장녀는 이공윤(李公尹)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동지(同知) 송윤(宋玧)에게 시집갔다.(중략)
왜란(倭亂)을 당한데다가 유행병과 흉년이 겹쳐 공께서는 중첩된 상화(喪禍)를 만났으나 몸소 주선하여 장례를 치르되 예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으며, 유리(流離)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글공부를 폐하지 않고 자손을 훈육하는데 몹시 근칙 방정하였다.
공은 그 타고난 자질이 곧고 독실한 군자였다. 지금 두 사문(斯文)이 이어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자손들이 번성하여 문호를 빛내고 있으니, 그 선행을 쌓은 보답이 이에 어긋나지 않는 까닭이리라. 삼가 이 말을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에 증빙이 되게 하노라.

경진년(1640) 봄에
통가후생(通家後生) 덕수(德水) 이식(李植)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