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정문부(鄭文孚) 충의공

가선대부 전주부윤 충의정공(嘉善大夫 全州府尹 忠毅 鄭公) 신도비명
현종 6년(1665년) 12월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신 태화는 말합니다. 왜적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북쪽으로 들어가 성을 무찔러 불사르고, 소하강(蘇下江) 동북에 있는 여진족이 기병을 깊숙이 몰고 들어와 무산과 부녕 땅을 짓밟았을 때, 병마평사 정문부(鄭文孚)가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청정을 치며 육진 밖에 깃발을 세우고 백탑 밑에 피를 밟아 여진족을 위압하여 굴복시킴으로써 변경을 온전히 하고 오랑캐의 기세를 꺾어 빛나는 공을 세우니 선조조 이후로 무공을 세운 여러 장수들 가운데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정국공신을 책정할 때 원수의 천거에 들어 있었으나, 거짓을 고하는 사람에 의해 조사를 받게 되었고 또 이른바 역사를 읊은 시로 죄를 묻게 되어 옥중에 죽고 마니 신은 적이 이를 슬퍼합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서쪽으로 쳐들어 왔을 때 명나라 황제가 대장군 이여송(李如松)에게 명하여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왜놈을 평양성 밑에서 무찔렀으나 다만 북쪽 땅은 멀리 떨어져 있는지라 명나라로서도 이를 구하지 못하고 이여송으로서도 이를 막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정문부는 22고을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큰 공이 봉작을 얻지 못하고 억울한 죄로 끝내는 붓끝에서 죽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닙니까. 신이 생각 하옵건대 맡은 사람에게 명하여 정문부에게 벼슬을 주어 북쪽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함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임금께서 곧 벼슬을 추증하니,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공의 성은 정씨요, 이름은 문부(文孚)요, 자는 자허(子虛)요, 본은 해주다. 젊어서 갑과에 급제하여 한성부 참군(叅軍)에 임명되었다가, 나가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었다. 임진년(1592년)에 왜군이 침입하여 6월에 왜장 청정이 북쪽으로 들어오니, 회령부의 관리 국경인(鞠景仁)이 왕자인 임해군(臨海君) 진(珒)과 순화군(順和君) 규(珪)와 남도병마절도사(南道兵馬節度使) 이영(李瑛) 등을 잡아 군중에 가두고, 임민(林珉)을 시켜 왜장 청정에게 바치게 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국경인의 작은아비 세필(世弼)이 경성에서 반기를 들고, 말수(末秀)가 명천에서 반기를 들어 왜놈의 앞잡이가 되니, 북쪽이 크게 어지러워져 절도사 한극함(韓克諴)과 우후 이범(李範) 등을 묶어 청정을 맞이했다. 이리하여 6진서부터 함관령에 이르는 천여리가 모두 왜놈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공이 참다못해 몰래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와 경흥부사 나정언(羅廷彦) 등과 더불어 경성으로 들어가 북방을 되찾으려 꾀했으나 무리들이 세필을 두려워하여 다 흩어져 가버린지라 다시 모을 수가 없었다.
공도 이를 버리고 떨어진 옷으로 입고 얻어먹으며 부령 정암산 속으로 들어가 나물을 뜯어 먹으며 지냈다. 오랜 뒤에 용성에 이르러 한인간(韓仁侃)이란 점장이 집에 묵게 되었다.
 인간이 유심히 바라보며 말하기를, 『당신이 병마평사가 아니오?』하고 후하게 대접했다. 8월 사이에 공은 선비인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두 사람과 더불어 혹은 업고 혹은 끌고 하며 샛길로 해서 남쪽으로 무계(武溪)에 이르렀다.
무계의 숨은 학자인 이붕수(李鵬壽)가 공의 얼굴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맞아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한달을 있다가 공이 바다로 해서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가려 하자, 붕수가 분개하여 공을 위해 말하기를, 『내 의병을 일으켜 왜놈을 치고자 몰래 열사(烈士)로서 장수가 될 사람을 구했으나 그럴 사람을 얻지 못했었는데, 지금 공이 이리로 와 주었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 북쪽을 도우신 거요.』하고 공을 붙들었다. 이어 의병을 불러 모으니 경성의 장사 인 문우(姜文佑)와 종 성부사 정현룡(鄭見龍)이 선봉이 될 것을 자원했고,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이 또한 찾아왔다.
붕수가 몸소 군량을 지고 샛길로 길주(吉州)로 달려가 왜놈의 군중 형편을 살펴 보았다. 이 때 청정은 안변(安邊)에 주둔해 있으면서 세필과 함께 첩자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공이 이를 걱정하여 문우를 시켜 기병 몇을 거느리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나타나는 대로 모조리 죽이니 드디어 첩자가 끊어졌다. 현룡 등이 공에게 군대의 대장 군호를 세울 것을 청했으나 공은 이를 듣지 않다가 붕수가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한 뒤에야 이를 허락했다.
무리들이 공을 떠받들어 대장을 삼고 현룡과 응태가 차장(次將)이 되었다. 공은 스스로 나이도 젊고 지위도 낮으므로 현룡에게 대장이 되기를 원했다.
때마침 여진족이 소하강으로부터 훈융 아산 무이 조산 등 네 진(鎭)을 쳐들어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이로 인해 공은 의병의 주맹(主盟)이 되어 연합전선을 펼 생각을 하고 곧 사람을 세필에게로 보내 달래고 깨우쳐 힘을 합쳐 변경을 지키자고 했다.
 9월에 공은 어랑리로부터 유정으로 나아가 다시 사람을 세필에게로 보내 부중(府中)에서 만나자고 청했다. 세필은 많은 군대를 증열시키고 기다렸다.
공은 휘하의 백여 기만을 거느리고 부중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해로서 거듭 깨우치니 세필이 무섭고 두려워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친족들을 시켜 공의 옆에 있으면서 동정을 살피게 했다. 사람들이 공보고 세필을 베라고 권한지라 세필이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했다.
공이 밤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필과 더불어 부중의 일을 이야기하며 조금도 의심하는 빛을 보이지 않으니 세필이 매우 기뻐했다. 그런 뒤 왜놈 90여명이 밤에 성 밑으로 다가온지라 공이 장병들을 시켜 처서 무찌르게 하니 그제야 세필이 그 아들과 더불어 왜놈이 장수를 사로잡았다. 공이 그 공을 기록하여 나라에 보고하게 하니 세필이 더욱 기뻐하며 마음을 편안히 했다.
공은 또 부중의 반란병들을 용서하고 일찍이 자기를 쏜 자를 비장(裨將)을 삼으니 육진의 군사들이 다 감격하여 휘하에 들기를 원했다.
얼마 후 회령에 있는 선비 오윤적(吳允迪)이 공의 의기에 감복하여 고을 향교에서 말하기를, 『경인을 목 베어야 한다.』고 하니, 부중의 의사인 신세준(申世俊)이 곧 호각을 불어 군사들이 다 모인지라 선비 윤립(尹笠) 등 6명이 군사들로 하여금 경인과 그의 수양아들 최인수(崔麟水) 등을 베게 했다.
 10월에 명천의 선비와 백성들 2백명이 함께 치니, 말수가 패해 달아났다. 부중에 있던 의사 김천년(金千年)이 말수와 그 부하 무리인 장응호(張應豪)등을 사로잡으니 이때부터 남과 북이 길이 열리게 되어 모은 군사들이 조금씩 이르게 되었다.
이튿날 공이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 다락으로 올라가 세필 등 30명을 모두 목베어 군대에게 보였다.
이로서 위세에 대한 소문이 북방을 진동시키니 각진의 자제들도 군대를 자원하는 사람이 6천명에 이르렀다. 공이 여러 장수들과 군대를 동원할 것을 의논하니 현룡이 말하기를, 『왜놈들이 한창 기세를 올리는지라 이를 대적할 수 없으니 아직은 경성을 지키며 틈을 엿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내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한 것 뿐이었는데, 이제 한 성만을 지키며 나가 싸우지 않고 안방여자의 흉내를 내겠는가.』라고 했다.
그리고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눠 영강역을 나섰다 몇 리를 가니 사람이 달려와 말하기를, 『왜놈의 군대가 많은지라 싸우면 반드시 이롭지 못할 것이니 성을 지키며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했다.
공이 성내어, 『네가 왜놈을 위해 우리 군대를 저지하려 하느냐』하고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깃대 위에 달게 했다. 명천에 이르러 방원 병마만호(防垣兵馬萬戶) 한인제(韓仁濟)로 복병장을 삼고 또 종사(從事) 원충서(元忠恕)로 정병을 이끌고 길주 북쪽 30리에 주둔하게 하여 왜적과 해정에서 싸웠다. 앞장서 먼저 올라오는 두 놈을 무찌르니 왜적이 도망쳐 달아났다.
충서가 이긴 기세를 타고 이를 추격하여 장평에 이르니 왜놈 직정(直正)이 장군 도관여문(都關汝文)과 함께 큰 군사를 이끌고 죽을 각오로 싸우려 했다. 문우와 충서가 좌우로 나누어 말을 달려 뚫고 들어가고 인제의 복병이 또 잇달아 마구 무찌르니, 모든 군사들이 용기를 불러일으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직정이 말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싸웠는데 오후 3시서부터 8시까지에 사방에서 나는 화살이 우박처럼 모여드는지라 왜놈들이 힘이 꺾이어 비로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문우와 충서가 다 말을 채찍질하여 잇달아 산비탈을 끼고 달려 올라가니 직정의 군대가 무너져 드디어 북쪽으로 달아났다.
문우가 뒤쫓아 장덕산에 이르니 도관 여문이 또한 화살을 십여개를 맞고 도망쳤다. 숨은 군사들이 사방에서 나와 크게 쳐부수어 그 큰 괴수 다섯을 죽이고 825명을 목 베었으며 나머지 도망쳐 산으로 들어간 놈들은 크게 불을 놓아 태워 죽였다.
그 밖에 화살을 맞아 벼랑으로 떨어져 죽은 놈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고, 버리고 간 말이 118필이었으며, 또 깃발, 창, 갑옷 등을 얻은 것도 매우 많았다. 11월 3위(衛)가 군사를 합쳐 길주를 포위하니 길주의 왜놈들이 굳게 지켜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급히 공격하면 희생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먼저 영동책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 영동책을 우리 손에 넣으면, 길주의 형세가 외로와지고 원조가 끊어질 것이니 그 때가 길주를 취하는 것이 새장 안에 든 새나 다름이 없다.』하고 즉시 군사를 옮겨 쌍개포에 이르러 직정과 만났다. 3위의 날센 기병대가 용감히 치고 들어가 드디어 왜놈을 압해정 밑에서 깨뜨리니 백여명의 목을 베고, 넘어진 시체가 50리나 널려 있었다.
공이 뒤쫓아 길주를 포위하고 이튿날 글을 써서 성안에 쏘아 보내니 왜놈들이 무서워 다 달아나 버렸다. 11월에 공이 비로소 세필을 목벤 공으로 특별히 통정대부의 품계를 더하게 되니,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공의 공로를 시기하여 곧 공문을 보내여 공의 대장직을 사임케 하고 현룡으로 이를 대신케 했다. 마침 절도사가 공에게 명령하여 6진을 순행하던 중, 여진족들을 어루만지게 되니 공이 부하 50명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가 각 고을의 죄있는 사람을 베고 공 있는 사람은 표창하여 어루만지고 막고 싸우고 지키는 것이 다 옳은 방법을 얻은지라, 여진족들이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저희들끼리 서로 타일러 약탈한 사람들을 다 돌려보냈다.
공이 술과 음식으로 그 추장 근 백명을 초청하여 대접하고 따뜻한 말로 타이르니 지난 봄 쳐들어왔던 운두(雲頭) 이남서부터 동건(童巾) 다온(多溫)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진족이 감히 다시는 변경을 침해하는 일이 없었다.
 
윤탁연이 공을 대장직에서 물러나게 한 뒤로 인심히 불안하여 6천명 의용군들이 흩어져 가버리는 사람이 많은지라 탁연이 그제야 겁이 나서 곧 공을 다시 대장에 임명했다. 이듬해 1월에 공이 혼자 말을 달려 길주로 들어가니 6천 자제들이 공을 보자 용기가 백배나 더하고 흩어져 갔던 사람들도 다 돌아와 모였다.
단천군수 강찬(姜燦)이공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왜놈이 고을 안을 마구 돌아다니니 바라건데 공께서 군사를 나누어 이를 쳐 주시오』했다. 공이 정병 2백명을 골라 4대로 만들어 성밖에 숨고, 단천 군사를 시켜 싸움을 걸고 거짓 달아나게 했다. 왜적이 뒤쫓아 고개 밑에 와 닿았을 때 4대가 함께 달려나가 이를 치니 왜놈이 패해 달아나며 총을 들고 쏘았으나 다 맞지 않았다
공이 힘써 싸워 혹은 그 앞을 가로막고 혹은 그 뒤를 끊어 60명을 목베었다. 그 뒤 닷새만에 청정(淸正)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직정과 군사를 합해 북으로 올라왔다. 공이 굳센 기병 6백을 이끌고 말을 채찍질하여 나아가며 말하기를, 『내가 나라를 위해 싸워 죽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다.』하니 장수와 군사들이 이에 따라 감히 물러나는 사람이 없었다.
종일 싸워 60리를 달려 백탑교에 이르러 가벼운 기병으로 곧장 왜놈을 쳐서 크게 깨뜨리니, 피가 온 들판에 흐르고 화살에 맞아 죽은 적이 천에 가까웠다. 왜놈이 시체를 싣고 성안으로 들어가 불을 놓아 이를 태운 다음 이에 청정이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하며 미처 밥도 지어 먹지 못했다. 이로써 북쪽이 비로소 깨끗하고 조용해졌다.
공이 최배천을 보내어 이긴 글을 올리니 선조임금께서 눈물을 흘리며 배천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의 품계를 내렸다.
그러나 윤탁연이 못마땅해 하며 공의 잘못을 낱낱이 들어 글얼 올린지라 공은 크게 쓰임을 볼 수 없었다.
3월에 영흥부사에 임명되었다가 온성으로 바뀌고 다시 길주 목사로 옮겼다. 그 뒤 곧 조정으로 불러들여 장예원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오니 북쪽 사람들이 글을 올려 공을 칭송한지라 품계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리고, 벼슬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과 병조참판으로 승진시켰으나 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하여 조심스럽고 말이 적었으므로 크게 술에 취하면 손들이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인조께서 즉위하자 원수(元帥)의 추천을 입으니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 장차 화를 면하지 못하리로다.』하고 곧 늙은 어머니를 위해 조용히 살기를 청했다.
전부 부윤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2년이 못되어 남의 거짓 고발을 당하게 되었는데 비록 옥에 갇혔으나 죄가 없으므로 마땅히 풀려 나와야만 했었다.
그러나 공을 미워하는 자가 공의 역사를 읊은 시 한 장을 가지고 또 중상하였다. 처음 광해주 때 공이 글을 지어 초나라 회왕(懷王)을 슬퍼한 일이 있는데, 대개 그 뜻에 말하기를, 『회왕이 한 번 무관(武關)으로 들어감으로 백성의 바램이 이미 끊어졌거늘 그 손자가 또 어찌하여 회왕이라 일컬었는가.』했다.
이에 최내길(崔來吉)이 그 시를 보고 마침내 세상에 전하게 되었던 것인데, 공이 이로 인해 혐의를 입고 고문을 당하여 인조 2년(1624) 12월 기사일(己巳日)에 옥중에서 세상을 마치니 그 때 나이 60이였다. 이듬해에 양주 밖 송산(松山) 동향(酉坐)터 선산에 장례를 모셨다.
숙종 때 시호를 내려 충의(忠毅)라 했다.
7세조인 정도공(貞度公) 역(易)은 태조 대왕을 충성으로 섬긴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백증조(伯曾祖)인 희량(希良)은 벼슬이 예문관 검열에 이르렀으나 거짓으로 물에 빠져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아버님의 이름은 신(愼)이니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내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의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봉사(奉事) 벼슬을 지낸 예(欚)의 따님으로 공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아들이 둘 있으니 맏은 대영(大榮)이요, 다음은 대륭(大隆)이다.
공이 이미 죽은 41년에 병마평사인 이공(李公) 단하(端夏)가 의논하여 말하기를, 『북쪽이 윤공(尹公) 관(瓘)이 처음 9성을 둔 317년만에 고을들이 몽고의 손아귀로 들어갔고, 김종서(金宗瑞)가 그 땅을 되찾아 6진을 두게 되었는데 김공이 처음 6진을 둔 161년만에 고을이 왜놈의 손에 들어간 것을 정공 문부가 되찾았으니, 이는 세 분이 힘써 평정한 것이다. 나라 법으로 제사를 지냄이 마땅하다.』고 제의하여 이에 북쪽 사람들이 공의 사당을 무계에 세웠다.
숙종이 이름을 창렬(彰烈)이라 내리고 글을 새겨 말하니, 『정씨집 드러난 이름은 정도공에서 비롯되니, 멀고 먼 7세에 공이 그 복을 이어 받았네. 처음에 평사로 임명되어 북쪽 군사를 도우니, 변방의 선비들이 와서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네. 섬 오랑캐가 심히 날뛰고 북녘오랑캐 또한 설치니 세 역적이 안에서 난을 일으켜 범의 날개가 되었었네. 아득한 북문이 왜놈에게 짓밟히고 변방의 신하들이 도적을 기른 것이 또한 심히 부끄러운 일이었네. 공이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무계로부터 떨치고 일어나니 네 의사가 용감히 함께 북을 올렸네. 인(仁)과 예(禮)로 갑옷삼고 충신(忠信)을 깃발 삼아 원수의 무리를 죽이고 마침내 성을 튼튼히 했네. 저장평을 짓밟은 군사 6천이여, 백탑에 이르러 하늘을 대신해 적을 무찔렀네. 이에 산오랑캐들을 어루만져 편안히 하고 달래어 주니, 오랑캐들 모조리 복종하여 다함께 왕의 거룩함을 칭송하였네. 북쪽이 평정된 것이 그 누구의 공이었기에 슬프다 너희 변방의 신하들이여 거꾸로 충신을 헐뜯었더냐. 빛나는 아름다운 시호 내려 굽은 것이 바로 되니 길이 밝아진 의로움을 빛내고자 이를 돌에 새기노라』했다.
삼가 생각건대 비문이 만들어진 것이 거의 백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돌에 새겨 해를 넘긴 뒤에 일이 끝났으며, 따라 엎드려 생각하니, 위 서문과 명문(銘文)이 물론 이미 근엄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대 임금께서 충신에 보답하는 법가 선배들의 덕을 높이는 의론에 이르러서는 또한 빠진 바가 없지 않았다.
삼가 상고해 보건데, 현종 때 내린 제문에 말하기를,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얼굴빛에나 말 속에 나타내지 않았고, 중간에 어둡고 탁한 시절을 만나 구슬이 작은 흠으로 버림을 당했다.』고 했고, 정조 30년(1789년)에 특별히 길이 제사를 받들게 하는 부조전(不祧典)을 내려 이를 표창했다.
문정공(文正公) 송우암(宋尤菴)이 말하기를, 『일찌기 임진년 왜란 때의 격문을 읽고 그가 어떤 사람인 것을 상상했다.』고 했고, 문충공(文忠公) 이월사(李月沙)는 말하기를, 『정문부의 인물과 재주와 그릇은 참으로 얻기가 어려우나, 다만 한가지 강직한 것이 너무 지나쳤다.』고 했으며, 문충공(文忠公) 민지재(閔趾齋)가 시호를 내리는 글에 말하기를, 『공은 효성과 우애가 천성에서 나온지라 부모를 섬기는데 그 사랑과 공경을 다했다. 광해 임금이 어둡고 어지러우니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는 술에 취해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문간공(文簡公) 민정암(閔貞菴)의 유집(遺集) 서문에 말하기를, 『거룩하고 뛰어난 자질로 날카롭고 깊고 빛나는 풍부한 지식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지라 크게 예술계의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고 했고, 문정공(文靖公) 이택당(李澤堂)이 선조실록을 지으며 특히 부군(府君)의 훈렬(勳烈)을 매우 자세하게 말하였으니, 이는 다 공정한 의론을 참되게 증거하는 영원한 재료들인 것이다.
 
부군의 큰 아들 대영(大榮)은 생원으로 집의(執義)에 추증되었고, 네 아들과 네 딸을 두니 큰 아들 유정(有禎)은 승지에 추증되고, 다음은 유상(有祥)이며, 다음 유우(有祐)는 승지에 추증되고, 다음은 유기(有祺)다. 딸들은 각각 권칭(權稱)과 조구(趙球)와 이강(李茳)과 허초(許礎)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 대륭(大隆)은 승지에 추증되고, 여섯 아들과 두 딸을 두니, 맏아들은 유인(有)이요, 다음은 유회(有)요, 다음은 유진(有)이요, 다음은 유종(有宗)이요, 다음은 유지(有祉)인데 부사직(副司直)을 지냈고, 다음은 유계(有9세손 인원(麟元) 삼가 기록함.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사신유(4 辛酉 1861년) 8월,
예조판서 대제학 황경원(黃景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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