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정문익(鄭文益) 용강공

성균생원 용강 정공 묘갈명(成均生員龍岡鄭公墓碣銘)
공의 휘는 문익(文益)이고, 자는 자겸(子謙)이다. 공은 문학과 행검이 잘도 가문의 명예를 계승하여 사람들은 그 형인 농포와 함께 난형난제라 일컬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몹시 고상하였다. 
1566 을묘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후부터는 과거 공부를 철폐하고 조용히 들어앉아 자신을 수양할 뿐이었다.
형 농포(農圃)가 시화(詩禍)로 죄를 입게 되자 드디어 형의 아들인 집의(執義) 대영(大榮), 승지(承旨) 대융(大隆)과 함께 영(嶺)을 넘어 남하하여 진주 비봉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아예 자신과 세상을 둘 다 잊어버렸다. 그러면서 용강(龍岡)이라 자호 하였으니 와룡불기(臥龍不起)의 뜻을 취택한 것이다.
1639년 10월 12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태어난 1568년 12월 16일을 따져보면 72세가 된다. 묘는 고을 북쪽 성태동(省台洞) 편곡(鞭谷) 유좌이다. 공의 아버지 휘 신(愼)은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증직이 예조판서였으며 판서공이 강릉김씨(金氏) 별좌(別坐) 흥례(興禮)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으셨는데 공은 그 중 막내이다.
배위는 수원 최씨(崔氏)로 현감 광규(光奎)의 딸이다. 묘는 공의 묘에 합폄하였는데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종형인 판관(判官) 문귀(文貴)의 셋째 아들 대형(大亨)으로 뒤를 삼았으니 벼슬은 동중추(同中樞)이다.
동중추의 아들은 유희(有禧)이고, 손자는 숙()과 식()인데, 식은 명나라를 위해 자정하면서 호를 명암(明庵)이라 하고 지평(持平)에 증직되었다. 숙이 三남을 두었으니 상함(相咸)·상채(相采)·상천(相天)이고, 식이 또 三남을 두었으니 상협(相協)·상정(相鼎)·상화(相華)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세업(世業)을 계승하고 경륜을 쌓았다.
그러나 지절(志節)이 고상하여 멀리 세상일을 사절하고 평범하게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따라 살았으므로 마치 상호(商晧)의 은둔과도 같았고 동생(生)의 경독(耕讀)과도 같았다.
 
담론자들은 모두 이르기를, 『형은 능히 나라에 충성하여 국란을 평정하였고 아우는 능히 가문을 지켜 그 훌륭한 모범을 남기었다.』하니, 군자들은 모두 사실임을 긍정하였다. 공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다 기술하기가 쉽지 않으니, 자주 가화를 겪어 전해지는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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