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정호학(鄭好學) 정선군수

통정대부 행 정선군수 정공 묘갈음기(通政大夫行旌善郡守鄭公墓碣陰記)
공의 휘는 호학(好學), 자는 민이(敏而)이다.
정도공의 손자인 호조참의 휘 침(忱)은 주부 유경(有慶)을 낳고, 주부는 전력부위(展力副尉) 휘 희공(希恭)을 낳았는데, 아들이 없어 당질인 판관(判官) 휘 언효(彦孝)를 후사로 삼았으니, 곧 참의공의 제3자인 군수 휘 흥경(興慶)의 손자이고, 선무랑(宣務郞) 휘 희문(希文)의 둘째 아들로, 공의 조부가 된다.
아버지 휘 연(淵)은 동부 주부(東部主簿)이고, 어머니는 영인 풍산 심씨(沈氏)로서 우의정으로 치사한 청천선생(聽天先生) 수경(守慶)의 따님이다.
공은 1560년 3월 15일에 태어나서 나이 32세에 이선(里選)에 의하여 비로소 현릉 참봉(顯陵參奉)이 되고 다시 정릉(靖陵)에 제수되었다가 경기전(慶基殿)으로 바뀌었다.
1594년에는 연이어 부모의 상을 만나고 1609년에는 다시 후능 참봉(厚陵參奉)이 되었으며, 군자감 부봉사(軍資監副奉事)에 전임되고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에 옮겼다가 통례원 인의(通禮院引議)로 승진되고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옮겼다.
1617년에는 현감(龍安縣監)으로 나갔다가 이윽고 대흥현(大興縣)으로 바뀌었는데, 마침 광해군 시대를 만나 미워하는 자의 꺼림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고, 1623년 반정 뒤에 바로 연기현(燕岐縣)에 제수되었다.
1625년에 세자를 책봉하고 그 요속(僚屬)을 선발할 때 전조(銓曹)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이배(移拜)되었으니, 이는 공의 행의(行誼)가 이 선발에 알맞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626년에는 익위(翊衛)로 승진되고, 1627년에는 세자를 호남에 호종(扈從)하였으며, 환가(還駕)한 뒤에 정선군수(旌善郡守)에 제수되었다가 1629년에 체귀(遞歸)되고, 1639년에는 수(壽)에 의해 품질(品秩)이 더하여 녹봉(祿俸)이 끊이지 않았다.
1642년 11월 21일에 83세를 일기로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고, 그해 12월에 부인(夫人)의 묘 우측에 합장되었다.
공은 수염이 아름답고 의표(儀表)가 엄의(嚴毅)하였으며, 몸을 예로써 단속하고 선대를 받드는데 효성을 다하여, 생존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정성이 노년에 이를수록 더욱 돈독하였으니, 이는 그 가학(家學)을 외조부 청천공(聽天公)에게 전수받은 때문이었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광주 이씨(李氏)로 기묘(1519)의 명현(名賢) 약빙(若氷)의 손녀이자, 급제 홍남(洪男)의 따님이고 관찰사 원계채(元繼蔡)의 외손이다.
부인은 1559년 2월 12일에 출생하였고, 15세에 공에게 출가해서는 양미(兩美 : 좋은 부부를 뜻함)가 덕을 짝하였으므로, 집안에서 다 칭찬하였다. 1627년의 난에 공을 따라 우거하다가 3월 11일에 전주 여사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양주 백암동 선산 정좌에 반장(返葬)하였다.
소생은 1남 1녀인데, 1남 도창(道昌)은 별좌(別坐)로 승지에 추증되고, 1녀는 현감 이경(李慶)에게 시집갔으나 다 공보다 먼저 가서 모두 자녀가 없다. (이하 생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