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정효준(鄭孝俊)

해풍군 제순공 신도비명(海豊君齊順公神道碑銘)
대질로(大老) 정공(鄭公)께서 1665년 6월 12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나이 89세였고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요 벼슬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요 해풍군(海豊君)의 군호(君號)를 받았었다. 돌아간 소식을 듣자 나라에선 조회를 거두고 부의를 보낸 다음 예관(禮官)을 보내어 위문하고 제사를 지냈다.
석 달을 지나 8월에 양주 해평리(海坪里) 서향터(甲坐)에 장례를 지냈는데 그 지석(誌石)의 글은 내가 이미 지었었다. 지금 공경(公卿)의 예로서 무덤 길에 제사를 지내며 그 빗돌이 이미 이지러진 지라 아들 판서공(判書公) 형제가 또 내 글을 청하여 빗돌에 새기고자 했다.
슬프다! 공은 내게 선배가 되며 일찍부터 사랑을 받았었고 늦게는 또 부자 사이에서 놀게 된 지라 공의 평생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삼가 행장을 참고하여 여기에 적는다.
공의 이름은 효준(孝俊)이요 자는 효우(孝于)다. 정씨(鄭氏)는 해주의 대성으로 위 조상은 숙(肅)이란 분이니 고려 때 명신이었고, 우리 조선에 들어와 찬성(贊成) 벼슬을 지낸 역(易)이란 분은 문장과 학문으로 태종과 세종을 섬겨 이름난 대신이 되었다.
그 아들 충경(忠敬)은 형조참판을 지냈고, 참판의 아들 종(悰)은 문종대왕(文宗大王)의 따님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양위(寧陽尉)에 봉해졌다. 영양위에 한 아들이 있어 이름을 미수(眉壽)라 했는데 재주가 “뛰어났으나 과거를 보지 않은지라 나라에서 조상의 공으로 벼슬을 내렸다.
그 때 단종비 송씨(宋氏)께서 아직 살아 계시며 단종의 생질인 아무개로 단종의 제사를 받들게 해주기를 청하니 성종께서 딱하게 여겨 이를 허락하고 이어 대대로 전해 내려가게 했다.
뒤에 임금에 대한 충성으로 공신에 책봉되어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이 되므로 다시 정씨 집안을 일으키게 되니 이 분이 바로 공의 고조가 되신다.
 증조의 이름은 승휴(承休)로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내고 찬성(贊成) 벼슬과 해림군(海林君)을 추증 받았으며, 할아버지의 이름은 원희(元禧)로 감찰 벼슬을 지내고 참판 벼슬과 해녕군(海寧君)의 추증을 받았고 아버지의 이름은 흠(欽)으로 돈녕판관(敦寧判官)을 지내고 판서 벼슬과 해성군(海城君)의 추증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추증을 받게 된 것은 공의 벼슬이 높아짐에서 온 것이다. 아버님 해성군은 효도와 공경이 지극하여 몸 가지기를 엄격히 하고 조상 받들기를 정성껏 했으며, 단종임금의 제사를 더욱 조심하고 깨끗이 받들어 늙은 뒤에도 오히려 게을리 함이 없으니 집안 법도가 그렇게 전해 내려 온지 오래였다. 어머님 평산신씨(申氏)는 판서 점(點)의 따님으로 선조 10년(1577) 3월 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이 일곱에 벌써 글재주가 뛰어나 하루는 봄을 읊는 글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글귀가 있는지라 외할아버지 판서공이 무척 기특해 하며 사랑하여 뒤에 크게 되기를 기대했었다. 과거 마당에서 글 잘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었고 병려체(騈儷體)에 특히 뛰어나,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도 끝내 과거에 오르지 못하니 인척들이 운수가 좋지 못한 것을 안타까이 여겨 조상의 공로로 벼슬을 주려 했으나 공이 이를 사양했다. 늦게 1618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는데 그 때 못된 무리들이 인목대비를 폐하려 꾀하자 공은 어몽염(魚夢濂) 정택뢰(鄭澤雷)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글을 올렸었다.
어몽염과 정택뢰가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공은 오히려 꺾이지 않고 박안제(朴安悌) 등 태학(太學)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이첨(李爾瞻)을 귀양 보내라는 글을 올렸다.
못된 무리들은 도리어 권력을 휘둘러 반대하는 사람들을 벼슬에서 내쫓았고 이이첨은 또 공의 성명을 벽에 적어놓고 자기 예측을 용케 맞추고져 했다.
공은 마침내 형편에 못 이겨 함경도로 나가 화를 피했다. 인조가 반정(反正)하게 되자 지난날 절개가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벼슬에 오르게 되었는데 공만 홀로 아무도 추천하는 사람이 없었다. 맨 나중에 효능참봉(孝陵叅奉) 벼슬을 받고 이어 전생봉사(典牲奉事) 벼슬로 옮기게 되었다.
1635년 1636년에 거듭 아버님 상과 어머님 상을 당하니 공의 나이 이미 예순인데도 상주 노릇을 예절에 맞추어 빠짐이 없었다.
1644년에 자여찰방(自如察訪)에 임명되고, 1646년에 공신의 자손으로 품계가 올라 오위장(五衛將)과 첨지중추(僉知中樞)를 거쳐 1652년에 돈녕도정(敦寧都正)으로 옮겼다가 1656년에 대질(大: 80살)로 품계가 오르고 군(君)으로 습봉(襲封)되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
공이 아들을 얻은 것이 비록 늦었으나 사랑으로써 가르침을 등한히 하지 않고, 여러 아들이 또한 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 스스로 배움에 힘쓴지라 십여년 사이에 네 아들과 한 손자가 잇달아 과거에 오르고 다같이 깨끗한 벼슬에 머무르게 되니 벼슬하는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며 감탄해 말하기를, 『옛날에 이른바 「동백나무 한 그루에 붉은 계수나무 가지가 다섯」이라고 한 것을 지금에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다.
임인(1662년)에 막내아들 적(樍)이 또 과거에 오르니 여러 대신들이 예조판서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임금께 아뢰기를,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른 일은 우리 조정에서 드물게 있는 일이요, 순전히 문과에만 오른 것은 더욱 적은데, 지금 동지 돈녕부사 해풍군 정효준의 아들 필선(弼善) 식(植)과, 승지 익(木益)과, 사간(司諫) 석(晳)과, 장령 박(樸)과 새로 급제한 적(樍) 등 다섯 사람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늙고 어진 신하로서 참되고 깊은 가르침이 있었음이라 온 세상으로 하여금 놀라게 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이는 글을 숭상하는 교화(敎化)에 빛이 있음이니 특전을 내리심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했다. 이 때 익과 석이 정례의 정무보고(政務報告)를 위해 함께 들어와 모시고 있더니 임금이 익을 돌아보며 나이를 물었다.
 
익이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 올해 여든 일곱입니다. 』하니, 임금이 감탄하여 칭찬하고 얼마 있다가 품계를 건너뛰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리니 해마다 쌀 다섯 섬을 내리라고 명하고, 이어 지돈녕부사에 임명했다. 공은 더욱 겸손하여 여러 아들들을 타일러 말하기를, 『우리 부자는 이미 분수를 지나치게 되었다. 나라의 은혜는 갚기 어렵고 조상이 끼친 일은 잃기 쉬운 것이니 너희들은 힘써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했다.
여러 아들들이 부모님 봉양을 위해 차례로 서울 가까운 곳에 지방장관으로 있으면서 자주 문안을 드리고 맛있는 반찬을 마련해 드리면, 공이 즉시 타일러 말하기를 『혹시라도 부모로 인해 너의 하는 일을 등한히 말라』고 했다.
그 복과 녹을 누리고 힘써 가리치고 인도함이 옛날 중국의 만석군(萬石君 : 漢文帝 때 石奮이 그 아들 넷이 2천석 녹을 받고 자신이 또 2천석 녹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萬石君이라 불렀다)의 기풍이 있더니, 봄마다 생일 때는 동갑 친구들과 홍공(洪公) 무적(茂績)과 김공(金公) 기국(耆國)과 신공(辛公) 계영(啓榮)과 함께 반드시 술을 나누며 서로 즐겼고, 또 찬성(贊成) 민형남(閔馨南)과 진솔회(眞率會)를 만드니 여러 공들이 다 나이 많고 착한 분이거나 덕이 높은 분으로 수염과 눈썹이 눈처럼 희였는데, 한창 즐거워 그릇을 두들기며 즐길 때는 공이 노래를 불러 이에 화답하고, 여러 아들들은 예복을 입고 술을 따라 올리며 수(壽)를 빌었다.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부러워하며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평생 약먹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이가 여든이 넘어도 더욱 총명하여 남과 이야기 할 때 옛일을 빠뜨리지 않고 내리꿰었고, 젊었을 때 지은 글들도 전쟁으로 불타버린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어 기록하기도 했다.
 늦게 스스로 호를 낙만(樂晩)이라 하고 가끔 글을 짓는 일이 있으나 다만 뜻을 즐겁게 할 뿐이고 구태어 곧고 날카롭게 다듬으려 하지 않았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집이 쓸쓸한지라 공이 어찌 외로운 생각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여러 아들들의 봉양이 지극하여 공으로 하여금 잠자리와 거처를 편안히 하고 듣는 것과 보는 것을 즐겁게 하니 한결같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는 것이 없었다.
공은 천성이 편안하고 솔직하며 겉은 부드럽고 속은 분명한지라 사람들과 사귀는데 아무런 간격이 없이 가슴을 탁 터놓고 진정으로 대하여 그윽한 향기와 따스한 기운을 풍기는지라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취하곤 했다.
집안에서 행하는 일이 아주 지성이어서 나이 여든이 지난 뒤에도 조상의 제삿날을 만나면 반드시 제계하고 엄숙히 몸소 제사를 받들고 사람을 대신 시키지 않았다.
또 집안이 가난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매들 집에서 돌려가며 지내게 하지 않고 반드시 직접 제사를 지내게 해 주었다. 가난한 집을 보살펴 내집 넉넉지 못함을 돌아보지 않으니 모두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에 바탕하여 이를 미루어 미치는 것이었다.

첫 부인 전주 유씨(柳氏)는 현감 영하(永賀)의 따님이었고, 둘째 부인 진주 유씨(柳氏)는 중광(重光)의 따님이었고, 셋째 부인 청주 한씨(韓氏)는 부길(富吉)의 따님이었는데 무덤은 모두 판서공의 무덤 아래에 있다.
내째 부인 정부인(貞夫人) 전의 이씨(李氏)는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진경(眞卿)의 따님이요 참찬(贊) 준민(俊民)의 증손이며, 어머님 정부인 경주 이씨(李氏)는 동지(同知) 우(佑)의 따님인데, 부인은 선조 30년(1597) 12월 10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착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덕과 법도가 있는지라 할머님 구부인(具婦人)이 사랑하여 기특히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어진 며느리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성품이 또한 총명하고 영리하여 둘째 오빠가 글을 읽으면 문득 그 뜻을 알곤 했다. 나이 열일곱에 공에게 시집오니 판서공(判書公)이 보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을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이 며느리일 것이다』했다.
공이 일찍이 세 번 장가 들었으나 그때마다 문득 상처하여 혼자 몹시 외롭게 지나더니 부인이 들어온 뒤 잇달아 다섯 아들을 두어 집안이 날로 번성해지니 사람들이 다 공이 좋은 짝을 만난 것을 신기하게 여기며, 또 부인이 착하고 아들이 훌륭하여 함께 만년의 복을 누린 것을 장하게 여겼다.
무릇 안살림을 50년을 다스렸는데 하는 일과 하는 말이 다 예의와 법도를 따라 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존경하며 집안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조상 받드는데 더욱 정성을 다하여 음식 만들고 상차리는 것을 몸소 하며 괴로운 것을 잊었고, 심지어 하녀들을 부리고 이웃과 마을 사람들을 대하는 데도 은혜와 도리를 아울러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사람의 도리를 밝히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이치를 아는 군자도 미치지 못할 점이 있었다. 여러 아들들이 차례로 글을 배웠는데 부인께서 직접 입으로 가르치고 때로는 매를 때리기도 하며 조금도 사랑에 치우치는 일이 없었다.
전실부인이 낳은 자식을 내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알뜰히 보살피며 자손들이 과거에 올라 공이 따로 하인과 하녀를 주면 부인이 곧 말하기를 『어른이 되어 과거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하시겠오. 내가 낳은 자식에게만 편벽되게 하여 내 마음을 편치 못하게 마십시요』했다.
매양 여러 아들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의 영화가 이미 분수에 넘었으니 내게 달고 무른 음식을 주는 걱정을 말라』고 했다.
공이 만년에 먹는 것이 너무 적자 반드시 손수 국을 끓이고 죽을 만들어 때때로 드렸다.
공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뜨니, 갑진(1664년) 12월 22일로 나이 예순 여덟이었다. 이듬해 임시로 양주 선영에 모셨다가 다시 그 이듬해 공과 합장했다.
모두 다섯 아들과 세 딸이 있는데 두 딸은 전주유씨 부인의 소생이다. 아들 식(植)은 필선(弼善), 익(木益)은 판서, 석(晳)은 참판, 박(樸)은 감사(監司) 적(樍)은 장령(掌令)이었고, 딸은 각각 목사(牧使) 오빈(吳빈)과 유학(幼學) 성후석(成後奭)과 도사(都事) 남성훈(南聖熏)에게 시집갔다.
식은 응교(應敎) 엄성(嚴惺)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과 네 딸을 낳았는데, 아들 중휘(重徽)는 도승지, 중창(重昌)은 현감, 중원(重遠)은 일찍 죽고, 중만(重萬)은 진사였으며, 딸은 각각 부사 임상원(任相元)과 이선징(李善徵)과 이만하(李萬夏)와 허점(許點)에게 시집갔다.
익은 제용감정(濟用監正) 박심(朴蕁)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아들 중태(重泰)는 찰방(察訪), 중하(重夏)는 일찍 죽고, 중조(重朝)는 봉사(奉事)였으며, 딸은 각각 참판 오정창(吳挺昌)과 도사(都事) 김성최(金盛最)와 권두선(權斗璿)에게 시집갔다.
석은 도사 박수소(朴守素)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는데 아들 중기(重基)와 중규(重規)는 함께 진사였고, 딸은 각각 이사상(李師尙)과 신필해(申弼諧)에게 시집갔다.
박은 광흥수(廣興守) 민여진(閔汝鎭)의 딸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중재(重載)와 중전(重)과 중계(重誡)와 중함(重)이고 딸은 각각 박해(朴)와 이숙(李)과 이이만(李晩)과 민언상(閔彦相)에게 시집갔다.
적은 판서 홍우원(洪宇遠)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중진(重鎭)과 중구(重龜)와 중민(重民)이고 딸은 무풍수(茂豊守)에게 시집갔다.
맏사위 오빈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으니 아들은 필선 벼슬을 한 두헌(斗憲)과 두선(斗宣)과 두성(斗宬)이요, 딸은 진사 임환(林)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아직 어리다. 안팎의 손자와 증손자와 현손자는 모두 백여명이나 된다. 아아 대저 사람의 뒤가 점점 커지고 잘되는 것은 오직 착한 일을 쌓은 데서 온다.

생각건대 해주 정씨는 찬성공이 그 터를 다지고, 해평부원군이 다시 회복했으며, 해성군이 이를 키웠고, 공에게 이르러 이를 크게 넓히게 되었다. 높은 벼슬은 온 집안을 빛내주고 문장과 학문은 거룩하게 끊이지 않았다.
하늘이 착하게 갚는 이치는 참으로 틀림이 없거니와 판서공의 형제가 잇달아 가문을 크게 빛내게 된 것은 또한 부모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아아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글을 지어 기린다.
 
해주정씨의 조상이 수없이 많건만 공께서 그 가운데 태어나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셨네. 바른 의론을 엄연히 지켜 사람의 도리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다시 남은 복을 자손에게 이어 주셨네. 다섯 아들이 문과에 오르고 한 손자가 뒤를 밟으니 금띠를 두르고 군호(君號)를 이어받아 나라의 녹을 자셨네. 신선 같은 태어난 모습이 이미 남달랐는데 높은 산처럼 늙도록 건강을 누리며 즐겁게 지나셨네. 귀여운 형제들 가운데 공이 홀로 오래 사시니 거듭 뭇 봉황이 높은 오동나무에 모인 것 같았네. 하늘이 주신 높은 나이로 복과 평안을 누리시니 옛 벌판에 높은 솔이 푸르고 무성함이로다. 크게 높은 빗돌을 세워 공의 무덤을 알리노니 높으신 이름이 더욱 커지리로다.

무오(1678년) 10월 일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강백년(姜栢年) 지음.

인물고(人物考)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쫓겨나고 이이첨의 무리도 처형되었다. 효준(孝俊)은 관북(關北)의 망명생활에서 집으로 돌아왔으나 나이는 이미 40이 가까운 중년에 세 번 장가들고 세 번이나 상처한 홀아비 신세에 슬하에는 아직 뒤를 이을 아들도 없고 내당에는 살림살이를 보살필 주부도 없으므로 비복(婢僕)들에 의하여 살림을 꾸려가는 형편이요 반정(反正)에도 직접 참여치 못했으니 특별한 훈공도 없고 무료한 시일을 보내며 낮이 되면 이웃에 사는 병사 이진경(李眞卿)의 사랑에 가서 이 병사와 장기 두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이진경은 참판(叅贊) 벼슬을 지낸 이준민(李俊民)의 증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문밖이 소란함으로 나가보니 한 젊은 임금이 여러 신하와 호종을 거느리고 집안으로 거동하는지라 효준(孝俊)이 황급히 맞이하여 부복하니 젊은 왕은 효준을 불러 이르기를, 『너는 조상을 받들고 또 나도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인데 언제까지 홀아비로 지낼 수 있느냐. 빨리 장가들도록 하여라. 이 사람은 너의 아내가 될 사람이니 자세히 보아라. 반드시 너의 집을 복되게 할 것이니라.』하거늘
효준(孝俊)이 머리를 들고 바라보니 자색(紫色) 옷을 입은 한 색시가 공손히 서있는지라 넋 없이 바라보다 꿈을 깨었다.
효준(孝俊)은 잠을 깨고 많은 상념(想念)에 잠겨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새자 다음날 역시 이 병사와 장기를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병사 집 대문 앞을 지나다 우연히 안쪽을 바라보니 문간에 한 색시가 밖을 내다보고 섰다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돌아서는데 입은 의복이며 자세와 용모가 전일 꿈에서 본 색시에 틀림이 없다.
지금껏 매일 이 문 앞을 지나다녔는데도 이 집안에 그런 색시가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하였고 또 그게 누구의 딸인가도 전혀 몰랐다. 마음속으로 이상히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 비복들에게 알아보니 그게 바로 다름 아닌 이 병사의 딸이라는 것이다.
몽사(夢事)를 생각하고 그 여인을 생각하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40이 다된 자기와 이웃 친구의 딸과 혼사를 이루기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을 두고 골똘하게 생각하던 끝에 하루는 또 이 병사와 장기를 두는데 내기를 걸자고 했다. 만약 이 병사가 지면 효준(孝俊) 자기에게 장가를 들여주고 자기가 지면 이 병사를 아버지로 모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병사가 지면 딸을 주고 자기가 지면 사위 노릇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평소 실력이 이 병사가 약간 우세한 편이었으므로 이 병사는 흔연히 응낙하고 3판 양승으로 승부를 짓기로 결정하고 장기를 두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병사가 두 판을 내리 맥도 못쓰고 지고 말았다. 『자 장기를 졌으니 내기를 시행하여야 할 게 아닌가.』하고 당장 내기 시행을 하라고 졸라댔다.
『장기내기야 어찌되었든 자네가 홀아비로 있는 것을 나도 늘 안되게 생각하고 마땅한 혼처가 없을까 하고 생각은 하네만 지금 당장이야 어찌 할 수가 있나. 차차 마땅한 혼처를 알아보도록 하세』 이 병사가 대답한다.
이때 효준(孝俊)이 『내기를 했으면 바로 시행하는 것이지 내기도 후일로 미루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나.』하고 다그친다.
이 병사도 당황하여 『이 사람아 아무리 내기라 해도 술이나 밥이라면 모르지만 내가 색시를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당장 날더러 어찌 하라는 것인가.』하고 도리어 핀잔을 준다.
효준(孝俊)은 이미 마음에 정한 바가 있으므로, 『색시가 왜 없단 말인가. 자네 딸도 있는데 자네 딸을 내게 주면 되지 않나. 내가 사위가 되겠단 말이다.』하고 대드니 이 병사는 하도 어이가 없어 바라보더니 화를 벌컥 내면서 『이 사람이 미쳤군.』 소리를 크게 지르고 벌떡 일어나더니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효준(孝俊)은 무안도 하고 한편 창피도 하여 곧 바로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다시는 이 병사 집에 장기 두러 지도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밤에 이 병사가 꿈을 꾸었는데 문간이 소란함으로 내다보니 한 젊은 군왕(君王)이 여러 신하와 호종을 거느리고 이 병사 집으로 거동하는지라 이 병사는 황급히 맞이하고 계하에 꿇어 엎드렸는데 젊은 군왕은 미소를 지으며 이 병사더러 하는 말이,
『내 경에게 부탁이 있어 왔노라. 다름이 아니라 경의 딸과 이웃에 사는 정효준은 천정연분으로 부부가 될 사이이니 서둘러 청혼하여 성혼토록 하라. 내 이 말을 부탁코자 전위해서 왔으니 부디 명심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하기 바라노라.』
이 병사 이 말을 듣고 몽중이었으나 왕명(王命)인데야 어찌하랴.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젊은 왕은 흡족한 표정으로 속히 시행하기를 재삼(再三) 당부하고 떠났다.
다음날 이 병사는 아무리 꿈이었다고는 하나 너무도 역력하고 전날 정효준과 내기장기 둔 일도 있고 하여 생각이 착잡하여 내당으로 들어가 그 부인에게 지난밤 몽사를 이야기 하고 의논하였다.
부인은 이 말을 듣고 펄쩍 뛰면서, 『아무리 그런 꿈을 꾸셨다 한들 꽃으로 말하면 아직 피지도 않은 봉우리인데 열일곱살 내 딸과 40이 다 된 홀아비와 혼인이란 말도 안되는 일이다.』고 펄쩍 뛰는지라 이 병사도 할 말이 없어 도로 사랑으로 나왔다.
그리고 벌써 몇일째 정생원도 얼씬하지 않고 생각이 착잡하여 공연히 울적한 심사로 날을 보내고 있는데 하루는 자다 또 꿈을 꾸었다. 역시 전날과 같은 차비로 젊은 왕의 행렬이 집에 당도하더니, 왕은 대청에 정자하고 이 병사를 불러 꾸짖어 가로되, 『네 어찌 감히 왕명을 거역한단 말인가. 반드시 엄벌에 처하리라.』하고, 노기 띤 용모로 호령이 추상같은지라, 이 병사가 혼비백산하여 복지 사죄하여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왕명을 거역하오리까.
다만 신의 처(妻)가 딸 자식의 나이 아직 어린데 어찌 늙은 정효준에게 출가시킬 수 있느냐고 나이 차이가 큼을 이유로 반대하옵기 오늘까지 미루어 온 것이요, 결코 왕명을 거역할 의사는 신에게는 추호도 없나이다.』하고 고두사죄 하였다.
젊은 왕은 진노를 풀지 않고 이 병사 부인을 불러 계하에 꿇리고, 『네 요망한 아녀자의 몸으로 감히 왕명을 거역하니 네 죄 만사무석(萬死無惜)하리라.』하고, 『태형(笞刑)을 가하라.』하니, 나졸들이 달려들어 부인을 형틀에 매고 종아리를 치는지라 매가 몹시 아파 부인이 슬피 울며,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오니 죽을죄를 용서하여 주소서.』하고 애걸복걸 하는지라, 젊은 왕은 매를 멈추라 하고 이르기를, 『네 만약 다시 내 명을 거역하고 일을 늦추면 반드시 큰 벌을 나리리라.』하고 물러났다.
이 병사가 꿈을 깨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지라 내당으로 들어가 부인을 찾으니 그 부인이 크게 신음하며 앓고 있거늘 그 연유를 물으니 부인 역시 몽사를 말하는데 자기와 꼭 같은 꿈을 꾸었음을 듣고 불을 밝히고 아픈 종아리를 살펴보니 매 맞은 자욱이 모두 부풀어서 유혈의 자욱이 뚜렷한지라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고 내외 상의하기를 아무리 꿈이라 하여도 소홀히 하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겠으니 이웃 정생원과 혼사를 맺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딸을 불러 이웃 정생원과의 혼사를 맺을 것을 이야기하니 의외로 딸이 흔연히 응낙하고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라 이 병사 이를 보고 탄식하여 가로되,『역시 천정연분이요 팔자소관이로다.』하고 당일로 매파를 정효준(鄭孝俊)에게 보내어 정식으로 통혼하고 이어 택일하여 혼례를 치루니 37세의 중년 신랑과 아리따운 열일곱 신부의 혼례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축복을 받으며 이루어졌다.
이날 밤 신방에 든 후 이 부인이 꿈에 신랑이 새알 다섯 개를 주거늘 이를 정중히 받아 치마폭에 싸서 간직하였는데 그 알속에서 모두 용(龍)이 되어 다섯 마리가 하늘로 솟으니 그 중 한 마리가 벽에 부딪쳐 떨어지거늘 깜짝 놀라 깨니 꿈이었다.
날이 밝아 입고 있던 홍(紅)치마를 살펴보니 치마폭에 알 다섯 개가 놓였던 자욱이 선명하거늘 부인께서는 얼른 다른 치마와 갈아입고 알 자욱이 있는 홍치마는 착착 개여 깊이 간직하여 두었다.
내리 아들 5형제를 낳고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문호를 빛내고 부모에 효성을 극진히 하였다. 막내아들 적(樍)이 벼슬이 장령(掌令)으로 청나라에 사신 갔다가 천진(天津) 다리에서 낙마(落馬)하여 객사(客死)하는 일을 당하니 전일 이부인의 꿈이 적중함을 알리라.
이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5형제를 오룡(五龍)이라 일컫고 진신(縉紳)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손자 중휘(重徽)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고 내외해로 하다 공(公)이 89세를 장수하였고 부인이 68세로 공보다 1년을 앞서 돌아가셨다.
꿈에 현몽한 군왕은 단종(端宗) 임금이 분명하고 꿈이 이와 같이 적중하는 일도 만고에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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