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정주한(鄭周翰)
참봉 정공 묘갈명(參奉鄭公墓碣銘)
남원부 대복동 임좌에 위치한 높다란 언덕은, 효자 참봉 정공의 묘이다.
그 가장(家狀)에 의하면 공의 휘는 주한(周翰)이고, 자는 가번(可藩)이며, 호는 해은(海隱)이고, 본관은 해주이며, 문과 전법정랑(典法正郞) 휘 숙(肅)은 그의 시조이다. 소부소윤(少府少尹) 휘 언(王言)과 정당문학 휘 윤경(允卿)에 이어 조선조로 와서 판중추부사 휘 성(晟)과 문과 장령(掌令) 휘 인로(仁老)가 있었고, 좌의정(左議政) 휘 을경(乙卿)은 호가 해정어수(海亭漁廋)이다.
큰 벼슬이 끊이지 않고 위대한 업적이 대대로 이어졌고 고조 휘 강(崗)은 공조판서이고, 증조 휘 기(旗)는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이며, 조고(祖考) 휘 숙(淑)은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이고, 아버지 휘 주(儔)는 진용교위(進勇校尉)로, 깊은 학문과 아름다운 행실이 당세에 알려졌다. 어머니는 초계 정씨 녹사 계생(繼生)의 따님으로, 경진(1520) 7월 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천품이 수미(粹美)하고 기우(氣宇)가 준결(峻潔)하였으며, 온아(溫雅)가 안으로 쌓이고 정채(精彩)가 밖으로 빛났다. 어버이와 어른을 섬기는 데 화락한 기운이 넘쳐흘렀고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데는 친소의 차별이 없었으며, 후학을 가르치는 데는 부지런하고 성의 있게 하여서 많은 사람을 성취 시켰으니, 이는 다 공의 뛰어난 행실인 것이다.
인종 병오년(1546)에는 특별히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으로 임명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70세를 1기로 기축년(1589) 4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배위는 순창 조씨(淳昌趙氏) 부사 용기(勇璣)의 따님으로 부도(婦道)가 아름다웠고 규범(閨範)이 정연(整然)하였다.
소생은 3남인데, 장남 학(鶴)은 주부이고, 다음 봉(鳳)은 생원으로 종숙(從叔) 세필(世弼)에게 양자로 갔고, 다음은 난(鸞)이다.
8대손 태서(泰瑞)는 충효에 의해 여러 차례 도(道)의 추천이 있었고 구례(求禮) 죽연사(竹淵祠)에 배향되었으며, 내외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아름다운 행실은 세상에 크게 쓰일만하였으나 다만 참봉을 제수 받음에서 끝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의 후손 수근(壽根)·기회(基拻)·기완(基完)·중현(重鉉)과 교관(敎官) 낙종(洛鍾)은 본시 나와 아분(雅分)이 있는 터이다. 그 가첩을 가지고 와서 묘도문을 청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그 대강을 서술한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해주 정씨 세가에 공이 태어나서, 조상을 잇고 후손에게 물려주는 데 오직 효도와 충성이었네. 백년동안 구원(邱園)에서 일생을 편안히 지내고, 훌륭한 자손이 많아 그 가풍을 이었어라. 나는 지금 돌에 새기어 영구히 후세에 고하네.
통정대부 행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
연안(延安) 이최승(李㝡承)은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