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 정여충(鄭汝忠)


통훈대부 행 우봉현령 호 매창 정공 비명(通訓大夫行牛峰縣令號梅窓鄭公碑銘)
증조 매창공(梅窓公)의 휘는 여충(汝忠)이고, 자는 공서(公恕)이며, 매창은 그의 자호(自號)이다.
우리 해주 정씨는 고려 때부터 현저하여, 시조 휘 숙(肅)은 시중(侍中)이었고, 여러 대를 큰 벼슬이 이어졌으며 휘 강(崗)에 이르러서는 검교(檢校)·한성부윤을 지냈으니 공에게 5세조이다.
고조는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에 겸 부지통례문사(兼副知通禮門事) 휘 기(旗)이고, 증조 휘 징(澄)과 고조 휘 신(侁)은 같이 생원인데, 신은 두 차례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고(考) 휘 승선(承先)은 병절교위이다.
휘 징(澄)의 2자 중에 장자인 휘 광(侊)은 검열(檢閱)로 소생이 없어 아우 신(侁)의 아들인 직장 승윤(承尹)으로 양자를 삼고 승선이 또 소생이 없어 공을 양자로 삼았으니, 공은 곧 휘 승윤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한양 조씨 만호 세필(世弼)의 따님이자 조선개국공신 한산부원군 조영무(趙英茂)의 후손이다.
공은 기해(1539) 10월 23일에 태어나서 계유년 생원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1592)을 만나서 연성(延城)을 방어한 공로를 세웠으니, 이는 선대의 묘소가 연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장(主將) 이정암(李廷馣)이 공을 의주(義州) 행재소로 보내어 첩서(捷書)를 올리도록 하였는데 선조가 특명으로 공에게 벼슬을 임명하고 원종 이등공신에 기록하였다. 처음에는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경력을 쌓아 우봉현령으로 나갔다가 사건으로 파귀(罷歸)되었다.
무신(1608) 정월 3일에 서울 집에서 고종(考終)하여, 연성의 남쪽 신산 성동 감좌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숙인 인동 유씨 사과(司果) 억년(億年)의 따님으로, 시조 승석(承錫)은 고려 때 이름난 재상이고, 묘는 공의 묘 우측 수십보 거리에 있다.
아들 문형(文亨)은 선무랑(宣務郞)이고, 사위는 안천록(安天祿)이다. 손자 동룡(東龍)은 희성(希聖)의 소생이고, 희현(希賢)은 출계하여 소생이 없다. 동익(東益)은 현감이고, 동직(東稷)은 생원이며, 동설(東卨)은 목사이고, 동석(東奭)은 일찍 죽었고, 동룡(東龍)은 현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공은 천성이 엄중하고 또 법도가 있었으므로, 당시의 동료들은 다 존경하여 「어른」으로 추중(推重)하였고, 시와 글씨에 능하여 함께 주고받은 사람들 중에는 문장거공(文章鉅公)이 많아 지금도 가장(家藏)에서 상고할 수가 있다.
공이 세상을 떠난 93년 만에 동설(東卨)이 안악군수(安岳郡守)로 비로소 돌을 깎아 이 비명을 세운 것이다.

불초 증손 동익(東益)은 삼가 기록하고 아울러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