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정희성(鄭希聖)

자로당 정공 묘갈명(自老堂鄭公墓碣銘)
군(君)의 휘는 희성(希聖)이고, 자는 대진(大進)이며, 성은 정씨로, 선대는 해주 사람이다.
선대에 증 좌의정 을경(乙卿)과 전서(典書) 강(崗)이 연이어 드러났고, 4세에 이르러 검열(檢閱) 광(侊)은 소생이 없어 그 아우인 생원 신(侁)의 두 아들 승선(承先)·승윤(承尹) 중에 승윤을 양자로 삼았는데, 승윤은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이다.
승선이 또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작은 아들 여충(汝忠)을 입양시켜 그 조부 징(澄)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는데, 여충은 선조 때 우봉현령으로, 군(君)에게 조부이다.
고(考)는 문형(文亨)으로 선무랑(先務郞)이고, 비(妣) 경주정씨(慶州鄭氏)는 삭녕군수 명선(明善)의 따님으로, 1589년 8월 27일에 군을 낳았다.
군과 나는 다같이 총산(蔥山)의 제자로 서로 잘 아는 터이다. 군은 순박하고 솔직하여 예스러운 기풍이 있었으며, 선(善)을 좋아하는 데 늘 부족해 하였고 악(惡)을 미워하는 데 마치 무엇을 털어 버리듯 하였으며, 처신이 방정하여 약간의 후회되는 점이 있어도 자고 먹는 것이 편치 않았으니, 지금같은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광해군의 정란(政亂)을 만나 조정에서 일하는 자가 자기에게 아첨하는 무리만을 불러들여 붕당을 만들었다. 그중에 서국정(徐國禎)이란 자가 군에게 과거의 친분을 내세워 매우 좋아하며 군을 백방으로 유치하려 하였으나 군은 수치로 여기고 만나 주지도 않았다.
그 뒤에서 국정을 농단하는 자들이 많은 선비의 이름을 도용하고 군의 발언이라 하여 글을 올렸고, 폐모(廢母)하는 일을 거론 할 때에도 군의 이름을 도용하였으나 군은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났다.
이에 한여직(韓汝稷)과 이기조(李基祚)와 김남중(金南重)이 깜짝 놀라며, 『이는 여러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같은 악명(惡名)을 입게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하고, 적극 신원(伸寃)해 주었다.
그 뒤에 귀하게 된 친구가 군의 높은 행의(行誼)를 알고 장차 군을 벼슬에 추천하려 하였으나, 군은 이미 인조 16년(1638) 4월 1일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군은 천성이 고고하여 현귀(顯貴)한 이와 종유(從遊)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곤궁히 지내며 자락(自樂)하였다. 날마다 옛 글을 탐독하여 그 뜻을 연구 하였으며, 음독(音讀)과 훈고(訓詁)에 정확을 기하여 자제들을 가르쳤다.
일찍이 몸을 닦고 말을 삼가하는 일로 경계를 삼아 권면하였고, 성행(性行)이 순실(淳實)하여 지나친 추앙을 좋아하지 않았는가 하면, 늘 말하기를,
『학문만 옛 사람과 같이 된다면 아무리 빈궁해도 유감이 없겠다』하였으니, 이는 다 옛 사람의 마음이었다. 나는 이를 매우 좋게 여겨왔다.
아! 나는 군의 인(仁)은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고, 충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의지와 기개는 사람을 깨우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듣건대, 덕이 있는 이는 반드시 그만한 보답을 받는다 하였으니, 군은 비록 빈궁한 일생을 마쳤으나 그 자손은 반드시 현달할 것을 단언 할 수 있다.
군의 배위는 군자감봉사 이호연(李浩然)의 따님이다. 소생은 5남으로, 동익(東益)·동직(東稷)·동설(東卨)은 다 성균진사이고 동석(東奭)·동룡(東龍)은 다 글이 빼어났는데, 불행히도 동석은 일찍 죽었다.
동익의 1녀는 시집갔고, 동직의 1남은 갓 성혼하여 성인이 되었고, 광도(光圖)와 그 아우 광주(光疇)는 숙성하여 참으로 사랑스럽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바탕이 곧고 행동이 순박하니, 옛 사람에게 비유 할 만하도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영경연사 허목(許穆)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