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정 화(鄭澕)
통훈대부 행 문화군수 형재 정공 묘표(通訓大夫行文化郡守亨齋鄭公墓表)
옛날에 사람의 상(相)을 잘 보는 이는, 사람을 상보는 데 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벗을 관찰하는 데 능하였는데, 나도 형재(亨齋) 정공(鄭公)에게 그러하다. 지금 공이 떠난 지 3백여년이 되었는데, 중간에 화재를 겪어 문헌이 모두 소각되었으나, 당시 제현(諸賢)이 공과 더불어 왕복한 편지 한 통이 아직까지 건재하다.
공의 후손 철근(哲根)이 손질을 가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표를 청하기에 나는 글을 할 줄 모른다 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삼가 상고 하건대, 공의 휘는 화(澕)로, 해주 사람이다. 고려 때 시중(侍中) 숙(肅)을 시조로 하여 큰 벼슬이 대대로 이어졌고, 조선에 와서 휘 강(崗)은 공조판서를 지냈다.
3세를 전하여 휘 건(健)은 전라도 어사로, 남원(南原)에 이주하여 자손이 드디어 대대로 살게 되었고, 2세를 전하여 생원 휘 세봉(世鳳)과 그 아들 휘 충보(忠輔)와 아들 휘 천길(天吉)은 공의 증조 이하 3세이며, 참봉 나주 정사언(丁士彦)은 그의 외조부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준수하고 문학이 있었으며, 당세의 명망있는 이와 종유(從遊)하여 상호 문학을 힘쓰고 강마하였다.
옥구현감으로 나가 많은 치적을 남겼고, 문화군수로 옮겨서도 옥구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만기가 차서 돌아오게 되자 백성들은 유임을 바랐으나 되지 않아, 만인산(萬人傘 :선정을 베푼 원에게 기념으로 그 고을 백성이 주는 물건으로서 양산과 같은 모양으로 비단으로 꾸며져 있다 )을 주어 그 공덕을 찬양하였고, 그 뒤에 영국훈(寧國勳)에 기록되었다.
을유(1645)년 정월 9일에 세상을 떠나, 남원의 주촌 임좌에 장사지냈고, 원배(元配) 경주 김씨와 계배(繼配) 청송 심씨가 합폄되었다.
아들 준창(俊昌)은 통덕랑이고, 준형(俊亨) · 준선(俊善)은 문학으로 알려졌으며, 손자는 7명이다.
아! 공의 생년과 표덕(表德)이 모두 실전되고, 관부(官簿)의 전말도 많이 누락 되었으므로, 기록할만한 행적을 증거 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의 글을 보면 공의 참 면목을 짐작 할 수 있다.
제현 중에 공과 더불어 절친한 분을 기록한다면,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 택당 이식(澤堂 李植) · 송애 김경여(松崖 金慶餘) · 포저 조익(蒲渚 趙翼) · 계곡 장유(谿谷 張維) · 기옹 정홍명(畸翁 鄭弘溟) · 낙정 조석윤(樂靜 趙錫胤) · 북저 김유(北渚 金瑬) · 양파 정태화(陽坡 鄭太和) 정익공 이완(貞翼公 李浣) · 죽남 오준(竹南 吳竣) · 만사 심지원(晩沙 沈之源) · 취성옹 윤구(醉醒翁 尹邱)와 우리 집안의 동림공 김광혁(東林公 金光爀)이고, 이밖에도 명석(名碩)들이 43명에 이른다.
무오 4월 하순에 통정대부 전 비서원 승(前秘書院丞) 안동 김영한(金甯漢)은 기록하고 숭록대부 전 지춘추관사(前知春秋館事) 해평 윤용구(尹用求)는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