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정태서(鄭泰瑞)

학생 송암 정공 행장(學生松庵鄭公行狀)
공의 휘는 태서(泰瑞)이고, 자는 시창(始昌)이며, 호는 송암(松庵)이다. 정씨는 해주를 본관으로 삼는다. 시조 휘 숙(肅)은 고려 조정에서 현달하여 벼슬이 전법사정랑(典法司正郞)에 이르렀고, 휘 윤경(允卿)은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니, 바로 공에게 16세조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정성이 있어, 밖에 나가 놀다가 좋은 과일을 얻으면 고이 간직했다가 부모에게 드렸다. 부모가 혹 병을 얻으면 걱정스런 표정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온 종일 간호하였으며, 부모를 섬기는데 일체 순종하는 것으로 법도를 삼았다.
13세에 부친의 상을 당했는데, 집상(執喪)하는 범절을 예제(禮制)에 따랐고, 지나친 통곡으로 슬퍼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마침 겨울철에 모친이 병을 얻고 신음하면서 생선회를 원하였다.
공은 앞강으로 나가 정성을 다하여 고기를 구하니, 갑자기 잉어 한 마리가 얼음 위로 뛰쳐나왔다. 즉시 잡아다가 회를 만들어 병중의 입맛을 도운바, 병이 드디어 쾌차되었다.
10년이 지난 뒤에 모친의 병이 다시 위급해지자, 정성껏 시탕(侍湯)하여 아침저녁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어 손가락의 피를 주입시켜 3일 동안의 회생을 보았으나 하늘이 돕지 아니하여 끝내는 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피눈물이 낯을 가렸고 상사 범절을 일체 의례대로 따랐다.
또 형제와의 우애와 친척과의 화목과 향당(鄕黨)과의 성신(誠信)도 이루 다 표현 할 수 없었다.
현종이 승하하였을 적에는 단을 쌓아 놓고 아침저녁으로 곡하였으며, 인산(因山) 전에는 나물밥으로 국상(國喪)을 마쳤음은 물론 그 덕량(德量)과 학행이 한 도(道)의 사표가 되었으므로, 원근에서 충효를 칭할 적에는 으레 공을 먼저 내세웠다.
숙종 갑오(1714) 2월 8일에 집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그해에 백연동(白蓮洞) 임좌에 안장되었다. 정조 갑진년(1784)에는 정려가 내려지고 죽연(竹淵) 안공사재(安公思齋)의 사우(祠宇)에 배향되었다.
사적이 호남문헌록(湖南文獻錄)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배위는 영천 이씨(永川李氏) 경운(景運)의 따님으로 아름다운 덕행이 있어, 시부모를 효도로 받들었고 부군을 공경으로 섬겼으며, 공 보다 20년 뒤에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잔수동 임좌에 장사지냈다.
소생은 4남 3녀이고, 내외의 손자와 증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후학 합천 이세서(李世瑞)는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