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정근(鄭槿)부인 이씨

효열 정려문(孝烈旌閭文)
효자 정근(鄭槿)은 용모와 기상이 화락(和樂)하고 단아(端雅)한 인사이다. 해주의 후인(后人)이자, 큰벼슬아치의 후손으로 마음가짐이 순효(純孝)하여,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였으나 능히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마침 신·임의 큰 흉년을 만나 아침저녁의 봉양할 자료를 마련할 수 없으므로 손수 상업에 나서서, 자로(子路 : 공자의 제자)의 부미(負米)를 본받고 포숙아(鮑叔牙)처럼 남은 이익을 기대하였다.
하루는 하동 섬진시장에 나가 남은 이익금으로 쌀을 사서 돌아올 때, 큰 비가 막 개이고 고을의 동문 밖 소아천에 물이 넘쳤다.
혹 어버이의 봉양을 거를세라 그 위험함을 따질 겨를도 없이 급류를 마구 건너다가 이내 침몰되고 말았으니, 임자(1732) 7월 26일이었다. 아! 믿기 어려운 것은 하늘이었다.
그 아내 이씨(李氏)가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었고 나이 또한 겨우 20세였는데 시신이 인양되어 있는 곳에 달려와서 시신을 안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밤낮 없이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다가, 하루는 노비에게, 효자의 침몰된 내가 어느 방향이며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 노비가 무심결에, 고을의 동문 밖으로 5리도 안된다고 하자, 이씨가 듣고 눈물을 줄줄 흘리더니, 장사가 끝난 뒤 9월 1일에 혼자서 효자가 침몰된 냇가를 오르내리며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으면서 두어 자 깊이의 웅덩이를 파다가, 마침내 내에 몸을 던져 죽음을 결정하였다.
가족들이 이 소문을 듣고 급히 가서 인양해 보니, 그 얼굴이 생시와 같고 눈물이 얼룩져 있어 은연중 비통함을 머금은 모습이었다.
내나 강물이 가는 곳마다 있건만, 꼭 효자가 죽은 곳을 찾아 지하에서 하종(下從)하였으니, 그 열렬한 절의는 천고를 통하여도 짝할 이가 적다. 천성을 가진 이라면 어느 누군들 감읍하여 애석해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어사 이이장(李彛章)이 고을에 들러 공의(公議)를 채취하여 임금에게 상신한 때문에 정려(旌閭)를 내려 영원한 명성을 수립하고 후세의 표본을 삼았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