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정 표(鄭標)
계재 정공 묘갈명(桂齋鄭公墓碣銘)
계재(桂齋) 정공이 세상을 떠난지 1백여년 만에 그의 5세손 기승(基承)이 돌을 깎아 그 묘에 세우기 위하여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자, 나는 기승과 절친한 터이라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표(標)이고, 자는 대윤(大允)이며, 계재(桂齋)는 그 자호이다. 선대는 해주 사람으로, 고려 때 전법사정랑(典法司正郞) 휘 숙(肅)은 그 시조이고, 조선조에 와서 증 좌의정 휘 을경(乙卿)은 공에게 14세조이다.
휘 영(渶)과 휘 문철(文喆)과 휘 위(緯)는 바로 공에게 고조·증조·조부 3세이고, 고(考) 휘 태서(泰瑞)는 세칭 송암(宋庵)선생이고, 비(妣)는 영천 이씨(永川李氏) 경운(景運)의 따님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특이한 얼굴을 지녔고, 더욱이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여, 집안에서나 고을에서 저마다 칭찬하였다.
부친의 나이 70세에 머리에 종기가 났는데, 아무 약도 효험이 없었다. 의원은 오직 두꺼비라야 치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침 겨울철이라 두꺼비를 구하기가 월궁에 있다는 두꺼비를 만나기 보다 더 어려웠다. 공이 하늘을 우러러 흐느낀 지 여러번 만에 갑자기 두꺼비 한 마리가 저절로 나타났다.
즉시 시험한바 병이 쾌차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다 지성의 감응이라고 하였다. 몇 해 뒤에 부친이 천명으로 세상을 떠나자, 공은 슬피 통곡하였고 시묘하면서 상을 마친 지 얼마 안 되어 별세하였는데, 그 생·졸은 자세하지 못하고, 묘는 구례 귀유동 갑좌에 안장되었다.
배위는 문화 류씨(文化柳氏) 인기(仁耆)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두었는데, 3남은 동후(東垕)·동규(東圭)·동신(東臣)이고, 딸은 함양 오명악(吳命岳)·전주 이계형(李啓馨)에게 시집갔다.
동후는 2남 1녀로, 장남은 수인(守仁)이고, 차남은 대(玳)이며, 딸은 재령 이붕운(李鵬運)에게 시집갔다. 동규의 1남은 유(琉)이고, 동신의 2남은 민(珉)·현(玹)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그 사적 멀다고 말하지 마오.
오래된 귀족(貴族)이었으니,
온갖 행실의 근원은
공이 가장 으뜸일세.
두꺼비가 계재(桂齋)에 들어왔으니,
그 지성 하늘에 감응되고,
귀유동(龜遊洞)에 안장 되었으니,
그 후손 천년만년 뻗치리.
가선대부 전 영변군수 해평 윤영구(尹甯求)는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