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 정기성(鄭基誠)

농은 정공 행장(農隱鄭公行狀)
공의 휘는 기성(基誠), 자는 인오(仁吾), 호는 농은이고, 정씨는 해주가 본관으로 고려때 시중 휘 숙(肅)의 후예이다.
휘 언(琂)은 증 이조판서이고, 그 아들 휘 윤경(允卿)은 정당문학이다. 3세를 전하여 휘 을경(乙卿)은 호가 해정어수(海亭漁廋)로 증 좌의정이고, 높은 벼슬이 연속되어 전라도 어사(全羅道御史) 휘 건(健)은 서울로부터 이사하여 호를 남은재(南隱齋)라 하였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자손이 그대로 거주하였으니, 바로 공에게 11세조이다.
6세조 휘 황(滉)은 주부, 5세조 휘는 사안(師顔)이다. 고조는 휘가 선(璿)이고 증조는 휘가 명동(命東)이며, 조부는 휘가 광국(光國)이다. 부친은 휘가 진룡(鎭龍)으로, 증 통훈대부호조좌랑이고, 모친은 증 영인(贈令人) 하양 허씨(許氏) 원(院)의 따님으로, 순조 기묘(1819) 12월 22일에 남원 백파수 외리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겨 뜻을 받들고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나이 겨우 16세에 부친의 상을 당했는데,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 실신까지 하였고, 장례와 제사에는 슬픔과 정성이 함께 지극하였으며, 아무리 질병이 있어도 상복을 벗지 않고 날마다 묘를 참배하여 3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몇 해가 지난 정묘(1867)에 모친의 병이 매우 위중하자, 여러 차례 대변을 맛보았고 지혈(指血)을 주입하여 며칠의 소생을 보았다.
그러나 천명이 한정되어 신도 능히 도와 줄 수 없었다. 마침내 모친의 상을 만나 장례 범절을 일체 부친상 때와 같이 한 때문에 이웃이 다 효를 칭찬하였다.
마침 남원부사 김기현(金箕絢)은 본시 사돈의 연분이 있었다. 공의 효를 듣고 부임 즉시 공을 방문한 뒤에 칭찬을 마지않으면서,
『공같은 효도에 공같은 덕이 있으니, 비록 배우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 이르겠다』고 하자 공이 사례하기를,
『부친을 일찍 여의고 또 우매하여 학문을 폐지하고 농사에 돌아갔는데,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공은 제발 헛된 추앙을 하지 마시오』하였다.
대개 공의 의취가 고기 잡고 나무 하는데 자취를 감추어 명리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 겸손한 때문에 김공이「농은(農隱)」이라 편액 하였으니, 공에 대한 추중(推重)이 이와 같았다.
공은 평소 입으로는 정사를 말하지 않고 발길로는 저자를 밟지 않았으며, 자제들을 경계하는 데 효제와 돈목을 권고하고, 비복을 거느리는데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겸하였으며, 친척과 친구의 환난과 위급에 있어서도 반드시 힘을 다해 구조해 준 때문에 누구나 다 열복하였다.
경오(1870) 5월 23일에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상원천 모득리 안산 진좌에 장사지내고, 배위는 광산 김씨 재택(在澤)의 따님으로 공보다 9년 먼저 세상을 떠나 주유동 선영 아래 유좌에 장사지냈다.

소생은 2남으로 장남은 태규(泰圭) 차남은 태종(泰鍾)이다. 종근(鍾根)과 노우원(盧禹源)의 아내는 큰아들 소생이고, 태종은 아들이 없으므로 족질 수근(洙根)을 후사로 삼았다. 안팎의 증손들은 아직 어려서 다 기록할 수 없다.
아! 공같이 아름다운 자질과 지극한 행실로 농가에 숨어 궁약(窮約)으로써 일생을 마쳤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의 장남 태규(泰圭)가 그 문헌이 장차 인멸되어 증거 할 수 없게 될까 염려하여 공의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장덕문(狀德文)을 부탁하였다. 나는 누차 글이 서투르다고 사양하였으나 굳이 청하므로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위와 같이 줄거리를 대충 서술하여 이다음에 입언 군자(立言君子)의 채택과 손질을 기다린 것이다.

정사 정월 17일에 순흥 안성호(安性鎬)는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