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정도익(鄭度翊)
눌재 정공 묘비명(訥齋鄭公墓碑銘)
평소에 듣건대, 헌종 시대에 효치(孝治)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을 세웠으므로, 치도(治道)가 높고 풍속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때 호남 구례에 효자 정공이 있어 춘추시대 정나라의 영고숙(潁考叔)을 본받고 증자와 민손(閔損)을 배웠으나, 산림에 깊이 숨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그 증손 중현(重鉉)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서울로 찾아와서 나에게 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손을 씻고 가장을 상고해 보았다.
공의 휘는 도익(度翊), 자는 화윤(華允),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해주이다. 시조는 고려 때 전법사정랑(典法司正郞) 휘 숙(肅)이고, 조선조에 와서 증 좌상 휘 을경(乙卿)과 공조 판서 휘 강(崗)은 공의 16, 17세조이다.
고조 휘 태서(泰瑞) 호 송암(松菴)과 증조 휘 평(枰)과 조부 휘 동유(東儒)와 부친 휘 집(潗)은 다 문장과 행실로써 유림의 우의(羽儀)가 되었고, 모친 이씨(李氏)는 본관이 성산으로 형성(炯星)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신해(1791) 10월 20일에 나서 자품이 온순하고 뜻이 애친(愛親)에 간절하며 재주가 뛰어나고 면학에 열중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화열(和悅)한 모습으로 말을 잘하지 못하는 듯하였고, 조심하는 행동으로 옷을 이기지 못 하는듯 하였으나 어떠한 위무(威武)로도 굽히지 못할 기상이 있었다.
일찍이 모친의 병을 간호할 적에는, 아침저녁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옷을 벗지 않았으며 새벽에 탕제를 드리기 위하여 첫닭이 울면 언제나 화로불 옆에 있었고, 날마다 미음을 마련하기 위하여 항상 부엌에 있었다.
상을 올린 뒤에는 손수 시저를 들어 권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번번이 그 양의 다소를 점검하여 부친께 고하곤 하였다.
의원이 말하기를, 오직 뱀의 기름이라야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마침 몹시 추운 겨울이라 눈이 쌓여 겨울잠을 자는 뱀을 구할 길이 없었다.
공이 울부짖으며 하늘을 향하여 비는 사이에 갑자기 뱀이 바위틈에서 나타나 머리를 쳐들고 꼬리를 흔들므로 즉시 잡아다가 신효(神效)를 보았다. 또 학질을 얻어 달포가 지나도 낮지 않자, 공이 다리의 살을 베어 국에 넣어 끓여 드렸고, 숨결이 촉박해져서는 지혈(指血)을 주입시켜 3일 동안의 소생을 보았다.
부친이 또 연세80세에 이르러 노병으로 신고(呻苦)하자, 시탕(侍湯)하는 정성이 모친의 병환 때보다 더하였다. 안팎으로 분주하면서 자리에 눕지 않고 제 때에 먹지 않다가 기력이 탈진하고 정신이 피로하여 자주 몸을 떨었다.
혹 잠시 건강에 유의하기를 권하는 이가 있으면, 이 어찌 남의 자식이 되어 자신의 병과 목숨을 고려할 시기이냐 하고, 시종 하나같이 태만함이 없었다. 운명하기에 이르러서도 지혈(指血)을 주입하여 12시각의 목숨을 연장시켰으니, 아! 훌륭하다. 참으로 대효(大孝)라 이를 만하였다.
공은 철종 계축(1853) 3월 1일에 63세를 일기로 집에서 세상을 떠났고, 구례군 계사면 수락동 자좌에 장사 지냈다.
공은 말할 줄 알면서부터 효경(孝經)을 배워, 출입하고 진퇴하는데 반드시 부모에게 여쭙곤 하였다. 이는 그 효도가 천성에 근본하여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니, 아무리 옛 사람이라 해도 여기에 더할 수 없었다.
또 평소 사람과 사물을 접할 때에도 유유히 천진 그대로였고, 조금도 꾸밈이 없었으니, 그 일언·일행이 근세 속류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이 어찌 이 세상의 사람이었겠는가.
배(配)는 청주 한씨(韓氏) 사인 익수(翊守)의 따님으로 3남을 두었는데, 여룡(汝龍)·관섭(瓘燮)·상섭(祥燮)이다. 여룡은 2남 2녀로 2남은 기혁(基奕) 기원(基元)이고, 2녀는 방환택(方煥澤)·임한휴(林漢休)에게 시집갔다.
관섭은 2남 3녀로 2남은 기봉(基鳳)·기동(基東)이고 3녀는 이호렬(李顥烈)·김인권(金仁權)·문재원(文在源)에게 시집갔다. 상섭은 3남 1녀로 3남은 기하(基夏)·기태(基泰)·기환(基紈)이고, 1녀는 유부영(柳溥榮)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 다.
옛날 헌·철종 시대에 효로써 나라 다스려, 태평을 구가하고 후복(後福)이 향기로우니, 세상은 다 이를 흠모하고 공은 오·직 그대로 행하였지. 어버이의 병환 매우 위급할 제, 손발이 균열되었을 뿐 아니라 눈 쓸고 뱀 찾았으니, 그 아름다움 맹종(孟宗)을 짝하네. 이 비석 높기도 한데. 저 계잠(桂岑) 푸르기만 하여라.
정사 대설일에 통정대부 전 비서원승 안동 김영한(金甯漢)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