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정기범(鄭基範)부인 이씨

전주이씨 효열 행장(孝烈行狀)
사람의 특이한 행실을 말하는 이들이 으레 효·열(孝·烈)를 칭하곤 하는데 이 어찌 보통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이겠는가. 옛날에 자하(子夏)는 이르기를,『부모를 섬기는 데 그 힘을 다할 줄 안다면,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 라도, 나는 배운 사람이라 이르겠다』하였고 옛 진(陳)나라의 한 효부는 이르기를,『시어머님을 봉양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남편에게 시어머님을 봉양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상에 나서겠는가 』하였으니, 이들은 공자의 제자이며 규중(閨中)의 모범이다.
사람의 높은 행실과 열렬한 절개가 어찌 이보다 더 클 수 있겠는가.

구례군 계사면에서 난 효자 정공(鄭公) 휘 기범(基範)은, 대대로 명덕(名德)이 배출되고 충효를 전수해 온 호남의 명망있는 집안으로, 젊어서부터 유망한 인재로 기대되고 일찍부터 높은 학문을 간직하였다.
그러나 산림 속에 숨어 오직 문학에만 종사하였으며, 효우가 더욱 돈독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데 완순하고 온화한 기색으로 그 뜻을 미리 받들고, 음식과 의복이 그 입맛과 몸에 알맞았으니, 증자(曾子)의 양지(養志)·양체(養體)의 효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를 말한다.
어버이가 47세에 이르러 병이 위중해지자, 공은 옷도 벗지 않고 밤낮으로 초조하게 걱정하면서 약을 끊이는 데 손수 물을 조절하였으며,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나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천리(天理)이라 마침내 상을 만났다. 그 피눈물을 흘리는 애통과 얼굴도 씻지 않고 수척해 지니 사람마다 탄복하였다.
장례에 이르러서는 토지면 외한동 건좌에 길지를 정하고 이내 시묘하여, 아무리 심한 추위나 더위와 거센 비바람이나 천둥에도, 단 하루를 게을리 한 적이 없었고, 3년 동안 애통해 하기를 마치 초상을 만난 때와 같이 하다가, 끝내는 슬픔으로 말미암아 얼마 안 되어 그만 별세하자, 시마봉 경좌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이씨(李氏)로, 전주의 명문 병묵(秉黙)의 따님이다. 가법이 정숙하고 부도가 온수(溫粹)하였으며, 공에게 시집와서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효도로써 섬기고 남편을 순종으로써 받들었으므로 이웃과 집안들이 다 그 아름다운 행실을 탄복하였다.
불행히 지난 갑자(1864)에 그 남편이 병을 얻어 약을 써도 효험이 없고 북두(北斗)에 빌었으나 응험이 없자 매번 대변을 맛보며 흐느꼈고, 증세가 점차 악화되자 지혈(指血)을 내어 주입시켜 겨우 3일간의 회생을 보았다.
마침내 상을 만나서는 순절을 맹서하다가, 홀로된 시어머니를 봉양할 사람이 없음을 생각하여 슬픔을 절제하고 울음을 억제하며 시어머니에게 식사를 권하였고 시어머니도 부인이 권하여 3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상호 위로하였다.
어느 때 또 시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하루에 세 차례씩 목욕하여 항시 젖은 의복으로 북두(北斗)를 향해 기도하는 데 손발이 갈라졌으며, 대변을 맛보고 지혈(指血)을 주입시키기를 남편의 와병 때와 같이 하였다.
상을 만나서는 슬퍼함이 법도에 넘었고 염장하는 데는 예제를 다하였으며, 삭망에는 으레 묘소에 나아가 전(奠)을 올리며 곡하였다. 매년 제삿날을 만나면 심신을 재계하고 제전(祭奠)을 깨끗이 하여 생존해 있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였으니, 예부터 효열과 특이한 행실을 청하는데 어느 누가 공의 부부와 같을 수 있겠는가. 아! 훌륭하고 아! 아름답다.

통정대부 행 중추원 의관 정태하(鄭泰夏)는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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