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정을경(鄭乙卿)

남양부 망해루기(南陽府望海樓記)
*을경(乙卿)공은 문학공(휘 允卿)의 증손으로서 생몰 연대는 불확실하나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사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의 자는 선보(善輔), 호는 해정어수(海亭漁叟)이며, 남양부사와 사헌부 장령을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망해루는 을경공이 남양부사로 계실 때 세운 정자인데 고려말의 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이 그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을 보면 을경공의 행적을 다소나마 엿볼 수 있다 *
남양부(南陽府)를 삼국 시대에는 당성(唐城)이라 불렀고, 고려 중세 이후에는 익주(益州)라 불렀다. 익주의 홍씨(洪氏) 중에 고려 태조가 처음 일어날 때 태조를 추대한 공로가 있었으니, 은열(殷悅)이 곧 그 사람이며, 대대로 거족이 되었다.
고려 말년에는 남양 부원군 홍문계가 권신 임유무(林惟茂)를 베어 죽이고 국정을 왕실에 되돌렸는가 하면, 문예부주(文睿府主 충숙왕비)를 낳아 충선왕과 충숙왕의 태모(太母)를 삼고 이를 부(府)로 승격시켰다.
대개 이곳은 산천의 영이(靈異)한 기운이 모여서 아름다운 상서(祥瑞)를 이루어, 억만년 동안 그지없는 왕업의 기초가 되었으니, 참으로 어느 고을과 동등하게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키는 신하를 중하게 여기었고 그 인선(人選)을 또한 신중히 하였다.

해정어수(海亭漁叟) 정후(鄭侯 : 을경공을 말함)가 이곳에 부임하여 속으로 생각하기를,
『해가 뜨고 지며 물에 근원과 끝이 있는 것은 그 범위가 제아무리 멀고 크다 해도 그 술(術)에 능한 이는 다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임금의 소자출(所自出)이겠으며, 신하된 이는 마땅히 이를 공경하여 감히 소홀히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는 영광된 명을 받아 임금이 태어난 곳을 지키는 신하이겠는가』 하고는, 아침저녁으로 삼가 덕화(德化)를 선무(先務)로 삼아, 그 아전을 감화시키는 데 형벌을 더하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감히 위엄을 부리지 않았으므로 겨우 1년 만에 크게 화합되어 이로운 일은 모두 진작되고 해로운 일은 일체 제거되었다.
이에 고을 안에 누(樓)를 지어 사람들이 장엄하게 우러르게 하고, 찾아오는 빈사(賓使)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름을「망해(望海)」라 하였으며, 그 아들인 국자생(國子生) 이(彛)를 보내 나에게 기문을 청하면서,
『본 고을에 연못이 있었는데, 오래 동안 폐기되어 위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아래는 물이 질퍽하므로, 주민들이 이를 경작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은 전설에 의하면 연못에 살던 용이 다른 데로 옮겨간 뒤부터 연못이 말랐다고 하나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정후(鄭侯)가 부임하여 그 연못을 다시 수리하던 날에 먹구름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일고 바람과 천둥이 억세게 몰아쳤다.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자, 용의 꼬리가 꿈틀거리며 연못에 닿아 내려왔는데, 연못에서 물이 솟아 나왔고 사흘 동안 흰 기운이 멎지 않았으므로 온 노유(老幼)가 다 탄식하며 이상하게 여기었다고 한다.
이어 내가 말하기를,
『마음의 작용이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한번 그 마음을 정하면 천하도 하잘 것 없는 것이다. 정후의 공경하는 마음이 먼 데까지 통하여 간격이 없으므로, 밝은 데에서는 사람들이 화합하고 어두운 데에서는 미물(微物)이 감응되었으니, 이 누쯤이야 어찌 작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먼저 이 고을의 고사를 말하고, 다음에 용이 되돌아온 사연을 기록하여 뒷 사람에게 알리는 바이다.
정후(鄭侯)의 이름은 을경(乙卿)이고, 자는 선보(善輔)로, 재간과 능력이 있어 세상에 알려졌다.
한산(韓山) 이색(李穡)은 삼가 기록하다.

종친회종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