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정유공(鄭由恭)

가선대부 행단천교도 유공 부군 행장(嘉善大夫行端川敎導由恭府君行狀)
공의 휘는 유공(由恭), 성은 정씨, 본관은 해주이다.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대대로 이어지다가 고려 말기에 휘 초(初)가 대장군으로 서북 지방의 병마절도사가 되어 여러 차례 큰 도적을 격파하여 변방이 편안하였고, 난봉(鸞鳳 :뜻을 같이 하는 친구)의 인연으로 영남의 선산읍 서쪽 상송리에 이주하였으니, 공에게 증조가 된다.
조부 휘 윤성(允成)은 생원이고, 부친 휘 희언(希彦)은 영동정(令同正)으로 호조참의에 추증되고, 비(妣)는 숙인 엄씨(嚴氏)이다.
공은 부친을 일찍 여의고 모친 엄씨를 받들어 지체(志軆)의 봉양이 아울러 지극하고 효제와 성경(誠敬)으로 기뻐 만족하며 부르고 답하며 들고나는 것이 모두 조심스러웠다.
기개와 도량이 준정(峻整)하고 성도(性度)가 깨끗하여 오직 선업(先業)을 계승하고 자제를 교훈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어느 해 교도관(矯導官)에 제수되어 생도를 가르치는 데 강마(講磨)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인륜을 밝히고 교풍(敎風)을 세우는 데 정성과 직무를 다하였다. 그 명성이 널리 전파되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교육 성적이 우수하다 하여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로 승진시켰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가 『감문의 인사가 본디 술주정만을 일삼고 학업을 힘쓰지 않다가, 정씨가 주거한 이후로 후학을 권장하고 풍속을 바로잡았다』하였다.
탄동은 감문의 승지(勝地)이다. 산악이 응중(凝重)하고 수석이 아름다우므로, 여기서 출생한 인물은 거의 희세의 문장이오 유도의 정인(正人)이었다.
공은 세상의 번화와 명리의 경쟁을 좋아하지 않고, 매번 화창한 봄날이면 모든 어진 벗을 초청하여 한가로이 소요하였으므로 그 의관문물이 사람들의 이목을 달리하였다.
일생동안 거기서 거처하여 선업(先業)을 잘 계승하였고, 훌륭한 자손 또한 수효가 매우 많았다.
공이 간지 이미 4백여 년이다. 세상이 거듭 변하여 사적과 실기가 다 산실(散失)되고, 다만 가승(家乘) 및 감문지(甘文誌)와 9대조 사암공(思巖公)의 탄동지(炭洞誌) 및 조매계(曺梅溪) 문집의 초약(抄略)이 남아 있으므로 삼가 위와 같이 기록한 것이다.

10대손 종석(宗錫)은 삼가 기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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