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 정후시(鄭厚時)


통덕랑 정공 탄동지후발(通德郞鄭公炭洞誌後跋)
내가 어릴 적부터, 탄동(炭洞)에 명인들이 많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으로 흠모해 왔는데, 안타깝게도 병화를 겪은 뒤로 문헌이 전해지지 아니하여 그 사실을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정후시(鄭厚時)공이 서술한 탄동사적(炭洞事蹟) 1책을 나에게 보이고, 이어 그 뒤에 한 마디의 말을 써 주기를 부탁하였다.
공은 진주제독(晋州提督) 정인서(鄭麟瑞)공의 막내아들로 나와 인척이 된다.
그 부탁이 간곡하고 의리 또한 사양할 수 없는데다가, 자세히 알지 못했던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을 기뻐하여 그 책자를 받아 다 읽어 보았다.
과연 어릴 때 들었던 말이 허위가 아니었고, 탄동에 명인이 많았다는 말은 사실 임·정(林·鄭) 두 집안이며, 다른 집안이 아니었다. 그 책자에 두 집안의 일이 자세히 기재되었는데 정씨의 일이 더욱 자세하게 다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은 어려서 우환을 만나 문학에 대해 쌓은 공력은 있지 않으나, 세상의 잘못된 일에 강개하고 우뚝하여 옛 사람의 풍도가 있었으므로, 능히 선대의 사적에 뜻을 두어 애써 수집하여 이 같은 완질(完帙)로써 한 동리에 전해지지 않던 사실을 전하니, 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아! 앞 사람들의 순정한 학행(學行)과 빛나는 문장과 아름다운 효렬을 읽어 보면 능히 상론(尙論 : 사람의 언행·인격 등을 논함)하고 흥기(興起)하게 될 것이다. 한 군에 현인이 많음으로써 그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는데 한 동리에 그처럼 많았으니, 이 얼마나 성대한가. 이 책자의 전해지는 것이 어찌 세교(世敎)에 관계되지 않겠는가.

갑인 2월 하순에 양계산인(陽溪散人) 이복(李馥)은 발문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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