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정영(鄭韺)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정공행장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鄭公韺)行狀)
공의 휘는 영(韺), 자는 화숙(和淑)이다. 공은 경술(1610) 정월 14일에 태어나서 어릴 적부터 이미 보통 아이와 달라 그 놀이하는 데 다른 아이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8척의 키에 외모가 헌출하고, 음성이 크고 우렁찼으며, 사랑채에 단정히 앉아 있으면 아무리 바쁜 중이라도 그 용모를 알아보았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응하였다가 고시를 맡은 자의 꺼림을 받아 붓을 던지고 웃으면서, 『어찌 다시 과거에 종사하여 속된 자들 앞에서 고하(高下)를 다투겠는가』하고 드디어 무술에 힘썼다.
을해(1635)에 갑과에 뽑혀 바로 인의(引儀)·참군(參軍)에 제수되고, 병자(1636) 겨울에는 감찰로서 인조(仁祖)를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총융사(摠戎使) 이시백(李時白)의 막하에 있었다.
그때 오랑캐의 세력이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공이 성위에 서서 방어하다가 적의 칼에 맞자 인조가 비단 두루마기를 벗어 하사하였다. 공은 상처를 싸매고 더욱 용기를 분발하여 종일토록 화살을 발사하여 마치 처음 성에서 나올 때와 같았으므로 특별히 훈련원 정(訓練院正)에 제수되었다가 창성부사에 승진되고, 가을에 만기가 되어 순천영장에 제수되었다가 군어(軍御)에 제수되고, 이윽고 춘천부사에 제수되었다가 경원(慶源)·길주(吉州)로 전임되고 이어 호남의 좌·우수사로 승진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 서북(西北)에 뜻을 두어, 공의 성명을 써서 좌우에 두었고, 양파(陽坡) 정태화(鄭太和)가 공과 절친하였는데, 효종이 승하하고 양파가 이어 죽자 공은 개탄하기를, 성은을 보답하지 못하고 지기(知己) 또한 이미 갔으니, 내가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하고, 드디어 전원으로 돌아와 일생을 그대로 마치려 하였는데, 왕이 불러 충청수사에 제수하였다가 경상우병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부임에 임하여 행장을 몽땅 한강에 집어 던지면서, 『나는 나라에 충성만을 알 뿐이다. 어찌 다른데 유의하겠는가』하였다.
얼마 안되어 그만 두고 돌아와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금의(錦衣)로 고향에 돌아오니, 이미 최고의 영행(榮幸)이다. 만약 만족할 줄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뒤에 총관(摠管)으로 부르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누차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다가 기미 5월 9일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왕이 크게 슬퍼하여 관원을 보내 치제하였고, 고아 부곡의 아버지 참판공(휘 思中)의 묘아래 장사지냈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식견이 뛰어난데다가 병가의 뭇 글을 관통하고 무예가 신묘하였다. 또 나라를 위해 죽을 충성과 세상을 바로잡을 도략이 있었으니, 참으로 옛날에 이른, 간성(干城)·복심(腹心)의 장수인데, 때를 만나서 그 실력을 크게 펴지 못하고 끝내 한가로이 물러나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생 동안 소인(小人)을 미워하고 권귀(權貴)에 아부하지 않았다.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를 잡았을 때 종처럼 알랑거리는 비겁한 무리가 다 그 문전에 모였으나 공만은 일체 찾아가지 않았다.
하루는 길에서 말에서 떨어졌는데, 김자점이 약을 보내고 의원을 보내 병을 물었으나 공이 병이 웬만하다 하고는 찾아가서 사례하지 않았다. 천성이 염결하고 의를 좋아하였다. 가세가 청한(淸寒)하여 나물밥을 면치 못하였으나, 4군 5진을 역임하는데 조금도 취하는 바가 없었고,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는 채찍을 들어 종자(從者)에게 보이면서, 『이 물건은 부임할 때 내 손에 있었는데, 돌아오는 때에도 마찬가지이다』하였다.
남한산성에 있을 때 이시백(李時白)이 유시(流矢)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그 아들 아무가 붙들고 호곡하였다. 이공은, 임금을 놀라게 하고 군중을 근심시켰다 하여 속히 군율로 다스리라 하였다.
공은 『아버지의 병환에 자식이 걱정하는 것은 효(孝)이고, 시기가 위태로워 군중을 엄계하는 것은 충(忠)일 것이다』하고, 즉시 죽은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대신하였다.
이공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가 성을 나올 즈음에 손을 잡고, 『오늘 우리 부자의 즐거움은 공의 덕이오』하고는, 칭사(稱謝)하기를 마지않았는데, 공은 이미 잊어버리고 있었다.

서원후인(西原后人) 정필검(鄭必儉)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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