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정동망(鄭東望) 행장
절충장군 충청도 청주 병마절도사 정공 동망 행장
(折衝將軍忠淸道淸州兵馬節度使鄭公 東望 行狀)
공의 휘는 동망(東望), 자는 위로(渭老)이다. 공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고, 기상과 도량이 높고 넓어서 큰 대인의 뜻이 있었다.
무오(1678)에 무예 출신으로 명성이 더욱 드러나 사귀기를 바라는 이가 많았다. 기미(1679)에 부공의 상을 만나 슬퍼하고 공경함이 다 지극하고, 효도와 우애가 하늘에서 나와 정부인 이씨를 섬기는 데 그 뜻을 순응하여 어김이 없었다.
이씨는 성격이 엄격하여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밥상을 물리치고 들지 않았으므로, 공은 반드시 관을 벗고 죄를 청하고 경(敬)과 효(孝)를 다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힘썼다. 이씨가 일찍이 학질에 걸리자 공은 대변이 달고 쓴 것을 맛보았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다가 병이 쾌차된 뒤에야 이전대로 돌아가곤 하였다.
생가와 양가의 자매와 더불어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이간하는 말을 하는 이가 없었으며, 엄격하게 집을 다스리고 관용으로 대중을 거느렸으며, 규문의 안에 단호히 법도가 있는 한편 옹목한 풍도가 병행되었다.
상(喪)을 마친 뒤에 이씨의 병으로 전·민(田民)을 갈라 남매끼리 분배하였는데, 자신은 천박한 전토와 늙은 하인을 차지하면서 「어찌 사양하는 미풍을 옛 사람에게만 양보하겠는가」하였다.
조모 김부인(金夫人)이 일찍이 우수한 전민을 골라서 공의 백씨에게 별급(別給)하였는데, 백씨가 별세한 뒤에 후사가 없자, 공이 모두 백수(伯嫂) 성씨(成氏)에게 돌려주면서, 「내가 어찌 참아 스스로 차지하겠는가」하였으므로 듣는 이는 훌륭하게 여기었다.
천성이 담박으로써 자수(自守)하여 번잡함을 싫어하고 한산함을 좋아하였다. 드디어 속리산에 들어가 시내를 임하여 집을 짓고 반묘 가량의 연못을 만들고 주위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죽장망혜로 그 사이에 노닐며 일생을 그대로 늙을 듯이 하여 조용히 숨어사는 선비의 풍도가 있었다.
산업에 단념하여 비록 가난하여도 편안해 하였고, 달밤에는 좌우에 명하여 거문고도 뜯고 노래도 부르면서 마음 가는대로 스스로 즐겼다.
또 음률의 음양·도수와 청탁·고하의 절차를 모두 통달하였고, 사람에게 상음(商音)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면서, 「북족 변방의 살벌한 소리를 어찌 나의 귀에 들리게 하느냐」하였다.
을축(1685)에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그 명성이 스스로 알려져 이같은 소명이 있었으나 본래 좋아하던 것이 아니었다. 병인(1686)에 생모 숙인의 상을 만나 거상과 슬퍼하는 절차를 전상과 같이 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 벼슬에 뜻이 없어 다시 속리산에 들어갔을 때는 도적이 조령을 점령하고 있으므로, 조야가 매우 걱정하였다. 토포사가 찾아와서 방략을 청하여, 마침내 공의 계책에 따라 도적을 평정하자, 방백이 조정에 상신하여 절충장군에 올려 제수되었다.
호서에 또 토적이 있어 공주에 그 노략질이 더욱 심하였다. 주장(州將)이 금제하지 못하여 이 사건에 의해 논척된 이가 매우 많았으므로, 조정이 사람을 가려 보내려다가 특별히 공의 이름이 상신되어 공주 토포사에 제수되었다.
이에 아침에 명을 받고 저녁에 부임하여 많은 방략을 세웠다. 인으로 무마하고 형으로 시위하는 한편, 긴 나무를 세워 놓고 적에게 가서 힐문하기를, 「너희가 너희의 죄를 안다면 내가 너희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 너희는 본시 직업이 무엇이냐」하고 농사를 짓던 자에게는 농기를 주고 장사를 하던 자에게는 전곡을 주겠다고 한 뒤에 다시 엄격한 어조로, 다시 도적이 되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므로 적들이 감복하고 스스로 해산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게 되었다.
숙천으로 옮겨 제수되어서는 청나라 사신이 왕래하는 요충지로 그 응무(應務)가 매우 번다하였으나, 위로는 사대하는 절차를 잃지 않고 아래로는 주민을 번거로이하지 않았으므로 이국 사람들도 다 그 위덕을 경복하였다.
여름에 오자 가뭄이 들었다. 삼일 동안 소사(蔬食)를 들며 재계하고 제를 지냈는데 제사를 마친 뒤에 비가 내려 큰 풍년이 들었다.
선정을 편지 3년만에 교화가 흡족하고 주민이 안락하여, 공의 사진을 그려 놓고 제(祭)하자는 의논이 사림에 발기되고 명성이 위에 알려졌다. 임금께서 배려가 더욱 융성하여 호남 좌수사로 올려 제수되었는데, 군률이 엄정하고 계책이 치밀하여, 그 신기(神機)와 묘책이 보통 생각에서 아주 달랐다.
가을에 수군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큰 바다에 나왔을 때 풍파가 갑자기 일어나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였으나, 공은 홀로 정색하고 단정히 앉아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니, 그 평생의 정력(定力)이 그러하였다.
계유(1693)에 통진으로 제수되었다가 다시 옥천으로 전임된 지 1년만에 치적이 자자하였고, 소명(召命)에 의해 돌아갈 적에는 그곳의 남녀노소가 말의 앞길을 막고 만류하는 자 만여명이 3일 동안이나 우화루(羽化樓)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밤을 틈타 사잇길로 떠나기로 하였다.
이어 세도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곧장 속리산으로 들어가, 『산은 아마도 나를 비웃을 것이다』는 시구를 읊었으니, 이는 그대로 숨어서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무인(1698)에는 특별히 해미(海美)로 제수되었다. 그때 8도에는 큰 흉년이 들어 해미가 더욱 심하였으므로 임금께서 백성을 위하여 현명한 관리를 뽑으라고 어명을 내렸다.
공은 명을 받고 즉시 나아가 심력을 다하여 낱낱이 진휼 하였으므로 주민이 모두 살아났고, 관용(官用)을 절제하여 일체 백성 구제의 자본으로 삼았으므로 잎을 따서 먹은 아노(衙奴)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가는 군진마다 다 돌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경진(1700)에는 충청병사로 올려 제수되었는데, 이미 노병한 터이라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있다가, 그해 8월 27일에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에 이르러『보검에 이끼 생기고 준마가 헛되게 늙었다』라고 읊었으니, 한 평생 강개하고 웅렬한 기개를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께서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사서(士庶)가 모두 통석해 하였다. 양호(兩湖)에서는 길 가는 자들이 서로 조상하기를, 우리의 현대부(賢大夫)가 갔다 하였고, 공주의 전 아전들은 앞을 다투어 달려와서 곡하는가하면, 빈소밖에 머물러 3년을 마치 뒤에 떠나는 이도 있었으니, 사람을 감화시킨 위덕의 깊음이 그러하였다.
공은 호준(豪俊)하여 얽매이지 않는 재주로 일찍 궁마에 종사하였다. 가슴 속에 간직한 만군과 수중에 잡은 보검은 참으로 물에서 물소와, 교룡(蛟龍)을 베어 천리 밖을 절충(折衝)할 만하였다.
그러나 청신(淸愼)으로써 자고(自高)하여 봉예(鋒銳)를 수렴(收斂)하였고, 평생의 언행이 진실하여 인인군자(仁人君子)의 규칙이 있었으니, 그 재질이 뛰어난 때문이라 하지만, 어찌 소양이 없이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는 가정에서 얻어진 유풍여운(流風餘運)과 하늘에서 나온 자품도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집에서는 은위(恩威)를 병용하여 처자가 감히 사정(私情)을 보이지 못하고, 관에서는 청백으로서 자양(自養)하여 관기(官妓)가 우물로 배척되었다.
일찍이 병풍을 만들어 신당선생(新堂先生)의 백밀서(柏密書)를 써서 좌우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관성(觀省)하여 자손에게 보이는 경계로 삼았으니, 이는 그 뜻이 격앙고고(激昻孤高)하여 공명에 급급하지 않고 영달에 구구하지 않았다.
임금의 명이 내리면 아무리 위험해도 사양치 않았고, 시대가 험난해지면 기미를 보아 물러났으니, 어찌 일찍이 아유구용(阿諛苟容)과 노안비슬(奴顔婢膝)로써 조그마한 효과를 바란 적이 있었겠는가. 다만 충성을 분발하여 몸을 잊고 임금을 위하는 적개심에서 축적된 것이었다.
즉, 벽에 적벽도를 걸어 놓고 책상에 삼국지를 안치해 두어, 제갈량과 관우의 충성으로써 자허(自許) 하고 천재(千載)의 신교(神交)를 삼았으며, 이충무(李忠武)의 충무를 흠모하여 글을 지어 치제하고 개연히 산하 장기(山河壯氣)의 느낌이 있었으니, 소동파(蘇東坡)가 말한 충의가 골수를 채우고 도의가 심장을 꿰뚫었다는 말은 공을 두고 이른 것이다.
소위 빌어먹는 처녀에게 시집갈 자금을 지급하고 서주(西州)에서 만기되어 돌아올 때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은 일은 백성을 구제하는 작은 은혜이며 맑고 고상한 덕의 여사(餘事)이다.
어찌 공에게 대단한 것이 되겠는가. 그 3군(郡)에서의 치적은 한대(漢代)의 순량(循良 : 수령의 어진 정사)에 부끄러움이 없었고 2진(鎭)에서의 주략(籌略)이 은연히 옛날의 명장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의 풍도가 있었다. 그러나 몸을 단속하고 행실을 절제하는 높음과 염퇴(蘞退) 은약(隱約)하는 지조가 완고한 유생이나 속사(俗士)로서 미칠 바가 아니었다.
만약 일찍부터 시례(時禮)에 종사하여 대도의 요(要)를 듣고 조정에 나가 왕유(王猷)를 협찬하였다면, 그 공훈과 명성이 어찌 굶주린 백성이나 주졸(走卒)의 입에서 전파되었겠는가. 불행히 시대를 만나지 못하였고, 중년에 휴퇴하여 도를 논하고 글을 지어 세속에 전하는 사업으로 삼았으니, 어찌 문지방을 박차고 붉은 기를 세울만하지 않겠는가.
아깝게도 공에게는 송당 박영(松堂 朴英)의 재주와 뜻이 있었으나 능히 그 뜻을 펼쳐 재주를 발휘하지 못하고 마침내 국한된 기예에 그쳤고, 또 하늘이 수명을 빌리지 않았다.
아! 공의 후덕과 유광(流光)이 오랠수록 더욱 번연(蕃衍)하였는데,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 자는 그저 무가(武家)로만 보고 있으니, 매우 개탄스런 일이다.
사정(師靖)이 늦게 이 고장에 주거하다가 비로소 공의 풍도를 듣고 흠앙하였으며, 또 공의 현손 유성(惟城)과 더불어 문자의 사귐이 있는 터라 그 세록(世祿)을 보고 공의 언행과 출처의 자세함을 알았는데, 당시의 제공들도 다 공의 청간(淸簡)하고 인후(仁厚)한 덕을 칭찬하였다. 이번에 유성이, 연조가 오래되어 실전될까 염려하여, 나에게 찬차(撰次)하는 일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인망이 없고 문재가 졸렬한데 어찌 그 아름다움을 천양할 수 있겠는가마는, 공에 대해 흠앙 강개하여 공을 상상해도 뵐 수 없음을 개탄해 온 지 오래이다. 드디어 세록을 상고해서 역서(歷敍)하고, 마음에 느낀 바를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이 다음 태사씨(太史氏)의 채택에 대비한다.
한산후인 이사정(李師靖)이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