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정찬(鄭巑)
절충장군 행 경흥부사군 행장(折衝將軍行慶興府使君行狀)
공의 휘는 찬(巑), 자는 경천(擎天)이다. 해주 정씨는 고려 말기부터 현저하여 휘 숙(肅)을 시조로 하였고, 공은 영특하고 호방하여 얽매인 데가 없어 어릴 적부터 거인의 자품이 있었다.
무자(1768)에 부친의 상을 만났는데, 그 때 10세의 나이로 집례(執禮)와 슬퍼함이 마치 성인과 같았고, 그 묘가 마을 뒤에 있는데, 아무리 심한 추위와 무더위라도 날마다 찾아가 곡하였다. 한 조객이 와서 조상하면서, 『너의 집안은 영남 무관의 대가로 가문이 혁혁하여 세상에서 견줄 수 없었는데 지금 이처럼 초라하니, 참으로 침체되었다』고 하였다.
공은 꿇어앉아 고하기를,『우리 형제가 있는데 어찌 침체되었다고 하시오』하자 그 조객이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말하기를,『장하다 그 말이여! 이 아이의 기상을 보니, 이다음에 성취를 미리 기약할 수 있겠도다. 옛말에,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 하였으니, 과연 그렇구나』하였다.
을사(1785)에 무과에 오르고 기유(1789)에 선전관으로 제수되었다가 계축(1793)에 참상 무겸이 되었다. 을묘(1795)에는 경상도의 우후(虞侯)로 절충장군에 승진되었다가 박천(博川)으로 나가 은위를 아울러 베풀어 온 경내가 크게 다스렸으므로, 백성과 관리들이 앞을 다투어 칭송하기를 『우리 군후(君侯)는 곧 옛날의 소부(召父)이다』하였다.
단천(端川)으로 이임되었다가 떠날 적에는 녹봉(祿俸)까지도 다 버려 그 행장이 초라하였고, 노소와 남녀가 앞을 다투어 흐느끼며 뒤를 따르므로 하루에 10여리밖에 가지 못하였다.
새 고을에 부임하였을 때는 한 고리(故吏)가 채찍 한 개를 받치므로 자세히 살펴보니 산호(珊瑚)로 만든 것이었다. 공이 이르기를,『이는 나의 물건이 아니다』하고, 꾸짖으며 채찍을 되돌려 주었다.
이 소문이 위에까지 알려지자, 정조가 환편(還鞭)으로 과제를 내고 하유(下諭)하기를, 이에 대한 해제는 선산 신포 사람에게 물어보라』하였다. 이후부터 공의 집안을 환편가(還鞭家)라 일컬었고, 단천 백성들이 모두 그 교화에 양육되어 저마다 성심으로 열복하였다.
얼마 안되어 경흥으로 이임되었는데, 그곳이 북방 먼 지방에 위치하여 풍속이 강포하여 본시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예의로써 가르치고 성경으로써 인도하여, 민속이 아주 달라지고 치화(治化)가 크게 행하여졌다. 박천 단천 경흥에 있을 적마다 수의(繡衣: 어사)의 표창과 주민들의 거사비(去思碑)가 있었다.
불행히도 신미(1811) 8월 9일에 53세를 일기로 임지에서 별세하자 백성들이 모두 통석해 하여 자신의 부모를 잃은 듯 여기었고, 개령 남면 조부촌 뒤 유좌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고령 박씨(朴氏) 세원(世原)의 따님으로, 나이 90에 정부인이 내려졌고, 묘는 자좌로 공의 묘와 같다. 자손은 워낙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누차 군읍을 맡아 그 치적이 옛날 순량(循良)에 뒤지지 않았으나 하늘이 수명을 빌리지 아니하여 좋은 재주를 펴지 못하였으니, 매우 개탄스런 일이다.
그 종손(宗孫) 기일(基一)이 가승(家乘)을 수집해서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여 후일의 신증(信證)을 삼으려 하기에 그 행적을 대략 서술하여 후세 상론군자(尙論君子)의 채택을 기다린 것이다.
을미 12월에 종 7대손 우섭(禹燮)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