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정윤신(鄭胤新)

성암처사 정공윤신 행장(省庵處士 鄭公胤新 行狀)
공의 휘는 윤신(胤新), 자는 술보(述甫)이다. 공은 천성이 인후(仁厚)하여 어릴 적부터 초목의 새싹도 꺾지 않고 날짐승의 알을 건드리지 않았으며, 모든 가축에도 그 소리를 듣고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였으므로, 보는 이가 기이하게 여기었다.
6세에 부친의 상을 만났는데, 이미 집상(執喪)하는 절차를 알았고, 평생에 부친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원통해 하며 그 백부를 부친처럼 섬겼다.
모친을 섬기는 데도 사철의 맛있는 음식을 빠뜨리지 아니하여 반드시 먼저 봉양하였고, 동생 광신(光新)과 거처했는가 하면, 동생에게 빈부사(貧婦詞)를 지어 자제들을 시켜 노래하여 모친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종제 지신(趾新)이 함께 궁마(弓馬)에 종사하기를 청하자 그 백부는,『우리 가문의 책임이 거기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공은 백부의 명에 따라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과 강좌(江左) 권만(權萬)을 사사하여 매우 추앙을 받았고,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칠계(漆溪) 최흥원(崔興遠)과도 도의(道義)의 사귐이 있었다.
또 동생과 종제 우신(又新)과 함께 거처하며 학문을 전력하였고, 과거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과거장에서 한 문사(文士)가 대작(代作)해 주기를 청하자 공은,『득실(得失)에는 운명이 있다. 의(義)가 아닌 일은 나는 할 수 없다』하므로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였다.
공은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보면 바로 외우므로 조정의 사적과 선배의 출처와 산천의 명승지와 군읍의 연혁을 마치 손바닥을 보듯 하였고, 집이나 마을에서 효우하고 조심스럽고 온후하여 어진이나 불초한 자에게 다 환심을 얻었다.
병인(1746)에 백부(휘 巑)공이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병이 위중하였는데, 종제 지신(趾新)이 서울에 있었으므로 공은 홀로 병상과 약화로 옆에 있어 심력을 다하고, 상을 만나서는 그 상복과 관곽에 정성을 경주하고 아침과 저녁으로 곡을 그치지 않았으므로, 경성부민들이 감읍하였다.
공은 평소에 이르기를,『사람은 본성은 누구나 다 선하나, 그 교육 여하에 달려 있으므로, 사람에게 구비된 자격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하였다. 가세가 본디 청한한 터이라 병·정(丙·丁)의 흉년을 만나 죽마저 가끔 거르면서도 빈궁을 구제하여 살아난 자가 많았고, 또 사족(士族) 최·이(崔·李)의 두 아이가 그 어머니를 모시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자, 그들을 안돈 성립시켜 주기도 하였다.
곤양의 선비가 이 고장에 귀양 와 있을 적에는, 공이 그 외로움을 가엾이 여기어, 나에게 오라하고 함께 거처하였다.
도망쳐 온 노비 수백명이 있어 그 신분이 이미 드러났는데, 그들은 중인(中人) 신분으로 속이고, 양반들과 혼인한 자도 있었다.
어떤 이가 그들을 모조리 본고장으로 되돌려 보내기를 청하자 공은, 『천인이라 해서 어찌 영원히 천인노릇만 시킬 수 있겠는가』하고, 그 노비 문서를 소각시켜 버렸다.
기축(1769)에는 종제 지신(趾新)이 횡성(橫城)으로 나오자, 공은 백모를 찾아뵙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데, 남야 박손경이 서(序)를 지어 전송하였다. 을미(1775)에는 모친의 상을 만났는데, 그때 공의 나이가 60이었는데 슬퍼함이 지극하였고 조석전(朝夕奠)도 자제들에게 대행시키지 않았다.
그 거처가 종가(宗家)와 이웃이었다. 아무리 심한 추위와 무더위라도 아침저녁으로 백모를 찾아뵈었으므로 백모는,『노인이 어찌 어린 사람의 하는 일을 되풀이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무신(1788)에는 장자 유성(惟城)이 죽었는데, 이치를 가져 자위(自慰)하였고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았다.
전 부사 종현(宗鉉)이 그 가장(家狀)을 나에게 보이며 행장을 청하는데, 가장은 곧 유욱(惟旭)이 기초한 것이다. 사실대로 기록되었고 부화(浮華)하지 않았으니, 더욱 감탄할 일이다.

아! 공은 신당(新堂)의 후손이자 눌은(訥隱)의 문도로서 가정과 스승의 훈도를 받아 배워서 행동이 질박하고 인덕이 높았다. 의당 조정에 나가 이름을 떨쳐야 할 터인데, 세상에서 숨어 일생을 마쳤으니, 이 어찌 그 자신의 복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아들 부사 유철(惟轍)이 누차 부진(府鎭)에 전임되어 높은 업적을 남겼으니, 그 진취가 더욱 한량없다.
공의 사행(事行)이 비록 많지 않으나 모두가 다 후생의 법칙이 될 것이므로 생략할 수 없다. 드디어 가장(家狀)을 상고해서 위와 같이 간추려서 이다음 덕 있는 이의 참고를 기다린다.

통훈대부 전 공충도 도사(通訓大夫前公忠道都事) 풍산(豊山) 유주목(柳疇睦)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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